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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성장통처럼 여름을 견뎠다

입력
2018.08.24 11:00
수정
2018.08.2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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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바람이 불었다. 책상서랍 속에 꼬불쳐 둔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 안양천 둑길로 나섰다. 지난 여름 얼마나 이 길을 걷고 싶었던가. 천천히 달리면서 몰라보게 변한 수변 풍경을 두리번거렸다. 맹렬하게 자란 수양버드나무 가지는 산책로까지 늘어지고, 여름풀 덤불에 홀로 선 고욤나무는 진초록 굵은 열매를 빼곡히 달고 있었다.

이쪽 끝에서 다리 건너 저쪽까지 1km 남짓 혼자 달리니 온몸이 땀에 젖었다. 선선한 냇바람을 맞으며 왔던 길을 도로 달리다가 산책로 벤치 앞에 멈췄다. 아까 저쪽으로 달릴 때 봤던 자세 그대로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꾸벅꾸벅 조는 듯, 어쩌면 아픈 듯 구부정한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가만히 옆자리에 앉았다.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이의 눈가에 물기가 가득했다. 손에 쥐고 있던 물병을 건네며 말을 붙였다. “어르신, 물이라도 좀 드시겠어요?” 느릿느릿 손을 뻗어 물병을 쥐던 모습과 달리 꿀럭꿀럭 마시는 모습이 퍽 생경했다. 달리 할 말이 없어 주춤거리는데 한숨 소리와 말소리가 같이 들렸다. “조금만 더 버텼으면 좋았을 걸, 나약한 사람.” 들어보니 해로하던 할아버지가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이 여름이 또 한 생을 거두어들였구나.

지난 한 달 사이 세 차례나 조문을 다녀왔다. 지인들이 연로한 부모를 잃었다. 며칠 전 갑작스레 생을 달리하신 한 어른은 딸의 사회 후배인 나에게 20년 넘도록 김치며 된장이며 푸성귀며, 때맞춰 챙겨 보내 주셨다. 눈감고도 그분의 손맛을 구별해낼 수 있을 만큼 내게도 친숙한 사람이었다. 그 어른이 돌아가시기 사흘 전인 목요일 저녁,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고향에 다녀오는 길이야. 더윗병을 얻었는지 엄마가 좀 기진한 것 같아서. 오후에 시간이 나길래 읍내 병원에 모시고 가서 영양제 놓아드리고 가는 거야.” 다음 주에 만나 점심을 먹기로 약속하고 통화를 마쳤다. 사흘 뒤인 일요일 저녁, 부고가 날아들었다. 서둘러 달려간 장례식장에서 선배는 맥없이 허둥대고 있었다. 여름을 버겁게 나신다고만 여겼을 뿐, 이렇게 느닷없이 어머니의 임종을 맞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거다.

그러나 빈소에 앉아 두어 시간 선배와 얘기를 하다 보니 이별은 남은 사람에게만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정으로 쓸 사진을 찾기 위해 부랴부랴 고향집으로 달려가 옷장과 서랍을 열던 선배는 주저앉고 말았다. 모친이 생의 마지막 며칠을 무얼 하며 보냈는지 그제야 알았던 것이다. 옷과 생활용품으로 가득 찼던 장은 거의 비어 있었다. 당신이 쓰던 오래된 세간살이마저 다 태워 버리고, 장례는 화장으로 치러 비석도 나무도 세우지 말고 선산 아래 뿌리라는 유언장까지 써놓은 뒤였다. ‘영정은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대신하라’는 글자와 함께 보자기에 싼 액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울먹이며 이야기하던 선배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자연의 섭리를 신앙처럼 따르던 자신의 어머니는 이 여름 당신이 완전히 소멸하기를 원한 것 같다고. 추억이 될 만한 옷가지나 물품 몇 개는 남겨둘 만도 한데, 염천에 기력이 다한 몸을 움직여 손수 태워 버린 모친의 마음을 가늠하자니 마음이 미어진다고. 눈물을 훔치며 나는 그저 선배의 손만 꽉 쥐었다.

그리고 이 저녁, 산책길에서 만난 낯선 노인이 울고 있었다. 여든 살은 넘은 듯 주름진 얼굴. 늙고 쇠하면 사그라지는 게 자연의 섭리라지만, 그 오랜 세월 함께 건넌 반려를 죽음으로 잃는 일이 어떤 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나는 입을 닫았다. 어쩌면 지금 이 어른에게는 혼자 냇물을 바라보며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조용히 일어나 목례한 뒤 나는 다시 달렸다. 바람이 거세게 불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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