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펠리시아 랑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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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피해 소련 피란… 아버지 수용소 수감
친척들 홀로코스트 희생 ‘소수자 고통’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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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예루살렘의 첫 유대인 변호사 개업
탄압받는 팔 시민 23년간 1000명 변호
동족들 손가락질… 인티파다 때 獨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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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국가범죄 국제사회에 고발
2009년 독일연방공로훈장 받아
펠리시아 랑거는 이스라엘 점령지 팔레스타인 시민들의 인권과 법적 권리를 위해 고군분투한 변호사였다. 그는 6일전쟁 직후 동예루살렘에 유대인으로선 최초로 변호사 사무실을 연 이래 23년간 거의 늘 패배하며 조국과 동포들로부터 '공공의 적'으로 밀쳐졌지만, 자신의 길이 팔레스타인 인뿐 아니라 조국 이스라엘을 아파르트헤이트와 쇼비니즘의 망령으로부터 구하는 길이라 여겼다. 그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희망이고자 했다. Wolfgang Schumidt, lightlivelihoodaward.org

1968년 이스라엘의 겨울은 기록적인 한파와 폭설로 시작됐다. 한 해 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으로 졸지에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게 된 동(東)예루살렘 팔레스타인 시민들에게 그 추위는 더 혹독했을 것이다. 자신들을 보호하고 권리를 챙겨줄 국가(요르단)와 경찰이 바뀌었다. 아니 적이 됐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겨울 어느 날, 한 팔레스타인 시민이 펠리시아 랑거(Felicia Langer)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왔다. 이스라엘 경찰이 터키에서 유학하다 갓 귀국한 아들을 막무가내로 연행해가선 얼마 뒤 피 묻은 옷가지만 돌려보냈다는 거였다. 그는 아들이 왜 연행됐는지, 지금 어디 있고 무사하기는 한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했다. 동예루살렘에 문을 연 최초의 유대인 변호사 랑거의 첫 수임 사건이었다.(972mag.com)

눈길을 달려 헤브론 경찰서에 도착한 랑거는 의뢰인의 아들 외에 다른 두 명의 무고한 팔레스타인 청년이 구금돼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의뢰인의 아들은 당시 반(反)이스라엘-팔레스타인 독립운동 단체인 파타(Fatah) 당원이란 혐의라도 있었지만, 다른 두 명은 단지 합법 공산당원이라는 이유로 연행된 경우였다. 이스라엘 경찰은 식민지 시절 영국 경찰이 잠재적 위험 예방을 명분으로 아무나 체포ㆍ연행해 구금하던 ‘임의구금(administrative detention)’ 권한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랑거의 첫 사건은 하지만, 후배 인권변호사 마이클 슈파르드(Michael Sfard, 1972~)의 말처럼 “점령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홍수를 이루게 될 장마의 첫 빗방울일 뿐(first raindrop in a monsoon)”이었다.

랑거는 68년 이래 23년간 그 ‘장마’같은 빗줄기 속에서, 점령지 팔레스타인 시민들의 법적 권리와 생존권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90년 독일로 망명한 뒤부터는 이스라엘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와 법적 정의의 부재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헌신했다. 그는 이스라엘 법정에서 팔레스타인 인을 변호하고 팔레스타인 정치인 추방 명령에 맞선 최초의 유대인 변호사였고,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팔레스타인 인들의 집을 파괴하고 고문하고 임의 구금하는 인권 유린 행위를 앞장서 고발했다. 다수의 유대인들에게 ‘조국과 민족의 배신자’ 혹은 ‘테러리스트들의 변호사’라며 손가락질 당했던 펠리시아 랑거가 6월 21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1979년 11월 바쌈 샤카 추방 사건 공판 직후 예루살렘 고등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에 응한 펠리시아 랑거. Herman Hanina, 972mag.com

랑거는 1930년 12월 9일, 폴란드의 독일 국경마을 타르누프(Tarnow)에서 유대인 변호사 아버지와 주부 어머니의 딸로 태어났다. 나치의 위협을 감지한 아버지는 랑거가 8세 되던 39년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으나 소련 국적을 취득하라는 요구에 불응하다가 스탈린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됐고, 그 후유증으로 종전 직후인 45년 별세했다. 그가 국적 취득을 거부한 까닭은 언젠가 귀향해 친척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였다. 패물과 피난살림을 팔아 연명하던 어머니와 랑거는 전쟁이 끝난 뒤 귀향했지만, 친척들은 모조리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뒤였다.(guardian) 훗날 랑거는 “러시아 피난살이의 경험으로 나는 난민이 어떤 건지, 권리를 박탈당한 소수의 삶이 어떤 건지, 참담한 가난 속에 사는 게 어떤 건지 배웠다”고 썼다.

랑거는 역시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3년 연상의 미시우 랑거(Mieciu Langer, 2015년 별세)를 만나 49년 결혼, 이듬해 이스라엘에 정착했다. 3년 뒤 외동아들 ‘마이클’을 낳았고, 아들이 6살이던 59년 텔아비브 헤브루대 로스쿨에 진학해 65년 변호사가 됐다.

박해를 경험한 유대인이 박해에 대응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힘을 길러 다시는 ‘내’가 박해 받을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데 몰두하거나, 박해ㆍ차별의 불의는 ‘누구’도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확장하는 것이다. 랑거가 변호사가 된 동기는 후자였다. 그는 1990년 ‘바른 삶 상 The Right Livelihood Award’ 수상 소감에서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 유대인이 타자를 억압하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공산당(Maki) 당원이어서 공직에 취임할 수 없었던 그는 한 로펌에 취직했다. 하지만 “이혼수당을 안 주려는 의뢰인을 편들어야 하는” 처지에 실망해 67년 텔아비브에 개인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그 해 6월 ‘6일 전쟁’이 터졌고, 이스라엘은 요르단 땅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 이집트 땅 가자지구,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수십 만 명의 팔레스타인 인이 난민이 됐고, 떠나지 못한 수십 만 명이 점령지 2등 시민으로 전락했다. 랑거가 그들의 편에 선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이듬해 그는 변호사 사무실을 동 예루살렘 코레시(Koresh) 거리로 이전했다. 당시만 해도 몇 년만 지나면 이스라엘이 점령지를 반환하고 평화도 회복되리라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기대는 박해와 차별, 점령지 내 유대인 정착촌 건설과 장벽 건설 등으로 무참히 무너졌고, 그의 고난도 끝없이 이어졌다. 사실상 가족을 부양한 건 사업가 남편 미시우였다.

랑거는 거의 승소한 적이 없는 변호사였다. 이스라엘-이집트의 상호평화조약인 ‘캠프 데이비드 협정(1978~79)을 맹비난했다가 이스라엘 정부의 추방 명령을 받은 서안지구 도시 나블루스(Nablus)의 민선시장 바쌈 샤카(Bassam Shakaa, 1930~)의 변론에서 이긴 건 드문 승리였다. 국제 여론이 샤카의 편이기도 했지만, 당시 서안 지역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었고, 지역의 다른 시장들도 집단 사직서를 들고 편들어준 덕이기도 했다. 하지만 샤카는 이듬해 6월 시오니스트 폭력집단의 폭탄 테러로 두 다리를 잃었고, 범인은 4개월 징역형을 살고 풀려났다. 국제 사회가 주목한 사건조차 그러했으니 무명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연루된 사건, 더욱이 폭력과 테러 관련 용의자로 지목된 사건의 경우 변론과 재판은, 국제 인권단체들의 주장처럼 사실상 ‘캥거루 재판(극단적 편파재판)’이었다.

건국이래 이스라엘은, 최근 개정한 국적법이 명시했듯 '유대인들의 국가'였다. 6일전쟁 이후 점령지 팔레스타인 인들은 국가의 노골적인 아파르트헤이트를 피해 다수가 인근 중동국가로 떠났고, 그게 여의치 않는 이들은 2등시민으로 차별 받았다. 2013년 8월 이집트 국경을 넘기 위해 대기 중인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시민들. 로이터 연합뉴스.

하지만 랑거 덕에 그들은 법정에서 항변이라도 해보고,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면회하고, 모포 같은 수감용품이나마 전달할 수 있었다. 랑거는 23년 동안 1,000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인들을 변호했다. 독일의 정치학자겸 저널리스트 루드비히 바트잘(Ludwig Watzal)에 따르면 “랑거는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들이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 다음으로 존경한 사람”이었다.(eurasiareview.com)

반면에 대다수 이스라엘 시민들에게 그는, 2016년 ‘올로프 팔메 상’을 수상한 유대인 저널리스트 기드온 레비(Gideon Levy, 1953~)가 밝혔듯이 “나처럼 교육을 통해 세뇌 당한 청년 세대에게 랑거는 내도록 반이스라엘의 상징이자 공공의 적이었고, 배척해야 할 반역자”였다.(haaretz.com) 랑거의 비서는 “랑거는 혼자 거리를 걷다가 욕설이나 물리적 위협을 안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택시 승차 거부는 예사였고, 죽이겠다는 협박이 너무 심해 일시적으로 사무실 간판을 내리고 경호원을 고용한 적도 있었다.

1987년 말 인티파다(Intifada, 팔레스타인 시민봉기)가 시작됐다. 유대인 테러 희생자들이 생겨나면서 탄압은 더 심화했고 정당화됐다. 구금자가 넘쳐났고, 고문도 횡행했다. 랑거의 일은 더 힘들어졌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아예 무의미해졌다. 군사재판은 기약 없이 연기되기 일쑤였고, 법정에 출두해야 할 피고나 증인이 군부 압력으로 재판정에 나타나지 않는 일도 허다했다. 1990년 5월 워싱턴포스트는 이스라엘 군부 발표를 인용, 인티파다 이후 첫 2년 동안 공공질서 유린 등 혐의로 체포된 팔레스타인인이 1만 7,000여 명에 이르고, 그 가운데 무죄 방면된 이는 약 400명, 기소된 이는 1만 명, 6,500여 명은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전했다.

랑거는 그 해 변호사 사무실을 닫고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다. 그는 “내 결정이 저항의 한 방편으로, 이스라엘 사법 시스템에 대한 절망과 환멸의 표현으로 이해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내가 팔레스타인인 피고를 변론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법시스템의 절차적 적법성을 홍보하는 데 이용된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더 이상 그 시스템의 치부를 감추는 ‘무화과 잎(fig leaf)’이 되지 않기로 했다. 그 결정으로 나도 고통스럽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아들이 유학 중이던 독일 튀빙겐에 정착한 그는 브레멘대와 카셀대에서 강의하고, 각종 토론과 국내외 강연 등을 통해 이스라엘 국가의 불의와 팔레스타인 ‘아파르트헤이트’정책을 국제 사회에 알리며 도움을 호소했다. 2005년 인터뷰에서는 “나의 전선(戰線)은 위치만 달라졌을 뿐, 결코 바뀌지 않았다.(…) 나는 대중들과 만날 때 내가 강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재판을 광대놀음(farce)으로 전락시키는 이스라엘 차별주의자 판사들 앞에서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70년대부터 자신이 겪은 바를 일기로 기록 ‘With My Own Eyes’(1975) 등 다수의 책을 출간했다.

그는 ‘바른 삶 상’ 외에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91), 1등급 독일연방공로십자훈장(2009), 팔레스타인 공로훈장(2012) 등 다수의 상을 받았다. 그의 독일연방훈장 수여를 앞두고, 독일 및 국제 시오니스트 유대인 단체와 유명인사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한 마디로 테러리스트를 변호하는 반유대ㆍ반이스라엘 선동가에게 훈장이 웬 말이냐는 거였다. 저명 정치평론가 랄프 지오다노(Ralpf Giodano) 등은 자신들이 받은 훈장을 반납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독일 연방 정부는 2009년 7월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며 “인권과 정의, 평화를 위한 그의 헌신”을 기렸다.

저 논란 와중에 랑거는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발언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극단적이라는 비판이 있다’는 한 독일 기자의 질문에 “뭐가 과격하고 극단적인지, 두루뭉실하게 말하지 말고 문제를 적시해서 말하자. 이스라엘 점령지 정책은, 대다수 전문가들도 ‘아파르트헤이트’라 지적한다. 내가 가자지구에서 자행되는 국가범죄를 고발하는 게 못마땅한 이들이 있겠지만, 국제사면위원회나 국제인권감시기구(HRW)도 똑같이 말하는 문제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더라도 진실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시민들을 움직이고 이스라엘에 압력을 가해 바뀌도록 하기 위해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길이다”라고 말했다.(deutschlandfunkkultur.de) 그는 자신을 테러리스트 변호사라 말하는 이들에 대해 “나는 천여 명의 팔레스타인 인들을 변호했지만 민간인을 다치게 하거나 숨지게 한 이들은 결코 변호하지 않았다. 그건 내 철칙이었다.(…) 내가 책에도 썼고 강연 때마다 말해왔지만 나는 팔레스타인의 미사일에도 반대한다. 다만, 그 폭력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원인을 살피는 건 반드시 필요하다. 점령이 비극을 낳았고, 팔레스타인 인들의 저항을 촉발시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핵을 보유한 세계 4위 군사강국에 맨손으로(have-nots) 맞서고 있다. (…) 점령이 폭력을 낳았다. 내가 증인이다.(…) 뭐라고 말할까? 아무 것도 본 게 없다고? 그렇게 말하면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나?”

1990년 독일 이주 후 랑거는 "다만 위치가 바뀌었을 뿐 나의 전선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 정부의 야만과 점령지 팔레스타인 인들의 인권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며 도움을 호소했다. wikipedia.org

랑거의 마지막 메시지는 지난 4월 투옥된 팔레스타인 의회 의원 칼리다 자라르(Khalida Jarrar)에게 보낸 공개편지였다. “당신이 체포된 건 이스라엘 감옥에 부당하게 갇힌 형제들과 정치적으로 연대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는 늙었지만, 기꺼이 당신 곁에 서서 당신과 당신 가족들과 연대하겠다고 마음으로 약속합니다.”(samidoun.net)

랑거는 2012년 요르단강 서안 나블루스 인근 난민캠프 중앙 광장이 ‘랑거 스퀘어’라 명명됐다는 소식을 듣고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고마운 감정보다, 두고 온 그들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그를 복받치게 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조국 이스라엘의 동포들에 대한 야속한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만년의 그는 손자의 약속, 팔레스타인 인들이 온전한 자신들의 국가를 갖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확신과 “할머니는 못 보더라도 내가 꼭 지켜볼 것”이라는 약속을 자랑처럼 간직했다고 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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