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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노동조합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을까

입력
2018.08.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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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는 민족에 대한 문화사적 해석으로 출간 당시부터 문제작으로 주목받았다. 민족은 “상상된 정치적 공동체로 본성적으로 제한적이며 주권을 지닌 것으로 상상되는(imagined) 것”(‘상상된 공동체’, 길)이라는 그의 개념은 신선했다. 혈연이나 인종, 영토 등에 기초한 종족적 실체로 민족을 사고하던 전통적 견해를 고려하면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고전의 진정한 미덕은 공동체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길을 개척한 것이거니와 그 핵심은 ‘상상’이다. 앤더슨의 상상은 근거 없는 망상이 아니다. 조작이나 날조도 아니다. 거칠게 요약하면 문화적 의미화와 공감이다. 그가 강조하듯, 같은 겨레라 하더라도 모두가 서로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각자가 민족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생각하며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는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상상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의미 부여와 소통을 통한 공유다. 한 사건을 발견하고 이를 구성원 모두의 공동의 것으로 발전시켜 의미화 하는 일이 상상의 내용이며, 소설과 신문, 인쇄자본주의라는 소통 매개물을 통해 의미를 공유하는 것이 그 방식이다.

민족은 말할 것도 없고, 공동체 역시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다. 경계가 제한적이며 구성원들만의 주권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앤더슨의 논의를 확장해 제한된 경계와 주권 자체를 상상의 대상으로 삼으면 어떠한가. 경계와 주권이 단단하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상상의 과정을 통해 유연하게 재구성된다면, 우리는 배타적 집단을 넘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유용한 전망을 하나 얻을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소수만을 위한 이익집단으로 비판받는 한국 노동조합의 변화를 위한 인식론적 자원을 얻는 셈이다. 본래 노조는 우애와 연대를 기본 가치로 삼는 노동하는 이들의 공동체였다. 지금의 한국 대공장 노조에서 이를 찾기란 난망하지만,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노조의 본래 모습은 그러했다. 연대의 공동체인 노조가 상대적 우위를 점하는 소수 정규노동자의 배타적 그룹으로 추락한 배후에는 어떤 기억이 자리하고 있는가. 외환위기를 거치며 경험한 집단해고의 상처, 이를 시장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선전하고 각자도생을 삶의 새 ‘윤리’로 각인하는 데 성공한 시장이데올로기, 이를 극복할 전략과 연대 형성에 실패한 노조운동의 무능이 중첩돼 있다. 여기에 노동자의 분할과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원ㆍ하청구조가 고착되면서 대공장 노조는 정규직만의 이익을 위해 대자본과 담합하는 집단으로 쪼그라들었다. 정규직은 이미 신분이 된지 오래고 ‘두 개의 민족(nations)’이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대립하고 있다. 인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지지부진한 이유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민족만큼이나 깊은 노동자 내부의 분리와 적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각자도생 논리에 쉽게 투항한 채 연대를 외면한 오류를 성찰하고, 변화를 위한 상상, 곧 의미부여와 공감의 대상이 될 시도를 축적해야 한다.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지만, 현대차 노사가 어렵게 첫발을 뗀 사회연대를 위한 실험은 주목할 만하다. 지난달 말 임금협상을 타결하면서 노사는 원ㆍ하청 불공정 거래와 양극화 해소 방안에 합의했다. 적정 납품 단가 보장과 투명거래 관행 정착, 하청업체 직원의 임금 안정성 확보, 부품협력사와의 상생을 위한 기금 500억원 조성 등이 주요 골자다. 단단한 지배구조에 대한 문제제기, 좁은 경제주의 넘어서기, 넓은 연대의 가능성 등 새로운 의미화를 위한 상상의 단초가 담겨 있다. 의미의 재발견과 공유를 통해 노동자 모두의 공동의 것으로 발전시킨다면 새로운 노조를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헛된 망상으로 끝나지 않도록 노조가 지속적 실천을 위한 통 큰 결단을 이어 가길 기대한다.

신은종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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