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다 맞을 때, 나 혼자만 안 맞았다”고 은근히 뻐기는 사람이 꼭 한 명씩 있다.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우상이었던 김지하도 그런 인물이다. 그가 쓴 세 권짜리 회고록 ‘흰 그늘의 길’(학고재,2003) 2권에는 “비록 잠은 안 재웠지만 그 무시무시한 타공의 지하실에서 고문은커녕 뺨 한 차례도 맞지 않았다”는 말이 나오고, 그의 산문집 ‘님 - 요즘 세상에 대하여’(솔,1995)에는 이런 말도 있다. “박정희 때 나는 정보부에 끌려가서도 절대 미움을 안 받았어. 그건 인간성 문제야. 나는 표독스런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지난 14일, 지위를 이용해 수행비서를 성폭력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 판결은 18일 오후 5시,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2만여 명의 분노한 여성을 불러 모았다(이 숫자엔 남성도 있다).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라고 붙여진 이 집회의 구호는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못살겠다 박살내자’였다. 이 구호에는 ‘워마드’ 느낌이 강하게 나지만, 집회에 참석한 2만 여명은 ‘웜’이 아니다. 현재 사이트 운영자에게 체포령이 내려져 있는 워마드는 민족(안중근)ㆍ노동 운동(전태일)ㆍ민주화에 더는 속지 않으려고 하며, 신성모독도 서슴지 않는다. 이제 워마드가 생겨난 상상된 원점을 찾아갈 때다.

1972년, 김지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중앙정보부는 그의 친구와 선후배 약 200여명을 남산으로 끌고 가 족쳤다. 그 가운데는 이화여대 ‘새얼’ 서클의 황소진이 있었다. 그녀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시인의 행방을 캐는 수사관에게 “발가벗긴 채 구타”를 당했다. 훗날 어느 정보부 직원이 김지하에게 그때 일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동이 트는 새벽이 되자 고문을 하던 정보부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김지하에게 조금이라도 손을 대면 내가 폭탄으로 정보부를 폭파하겠어. 약속해요! 손 안 댄다고! 그러지 않으면 죽어도 내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나올 거요.” 그 말을 전하며 정보부원이 덧붙였다. “소름이 확 끼쳤어.”

김지하는 저 일화를 기술한 다음, 나 때문에 고초를 당하게 해서 황소진에게 미안하다고 썼을까? 빈말로라도 그녀를 위로했을까? 저 일화 끝에 김지하는 또 한 번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뺨 한 번, 욕설 한마디 맞거나 듣는 일 없이 취조 받았다.” 김지하는 자기미화를 위해 저 일화를 꺼냈을 뿐, 황소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김지하는 알면 알수록 허상(虛像)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여성은 민족해방 투쟁ㆍ노동 운동ㆍ민주화에 똑같이 참여하고서도 황소진처럼 남성을 돋보이게 하고 잊혀지거나, 여전히 몫이 없는 2등 시민으로 남았다. 그리하여 성폭력ㆍ성차별 끝장집회에 나온 평범한 이모(55)씨는 결코 웜일 리 없지만, 웜과 동일한 인식에 도달했다. “과거 나를 비롯한 386세대 여성들이 여성인권을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딸들만은 정말로 여성이 동등한 권력을 갖는 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설득하기 위해 나왔다.”(한소범 기자, ‘“성폭력 끝장내자” 촛불집회처럼 모였다’, ‘한국일보 8월20일자)

남성 사회는 남성의 항문은 지켜주지만 여성의 생식기는 지켜 주지 않는다. 사단장이 당번병을 비역했다면 어떤 남성도 그것을 ‘합의’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 짓거나, 당번병이 사단장에게 ‘꼬리를 쳤다’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사단장이 뭐라고 우기든 그것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강간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여성 정무비서가 도지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면 합의된 ‘불륜’이나 ‘꽃뱀’으로 몰아간다. 남성이 여성과 똑같이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거나 성추행을 당하는 일이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세계에서는 남성들도 반바지를 입거나 살갑게 굴었다는 이유로, 또 밤늦게 술집에 있었다는 이유로 여성과 똑같은 희생자가 될 것이다. 그런 조건 속에서라야 남자들은 표피(피부) 수준이 아닌 더 깊은 층위에서 인간의 자존심과 고난을 만나게 된다. “다 당할 때, 나 혼자만 안 당했다”고 말하게 된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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