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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왜 참았느냐고 묻기 전에

입력
2018.08.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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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목욕할 때도 휴대폰은 투명 비닐에 담아 소지한다.”

안희정 공판이 진행 중이던 때 유독 나의 눈을 붙잡았던 구절이다. 나 역시 같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16년 전 한국일보에 견습기자로 입사해 지금은 없어진 청량리 경찰서 2진기자실에서 ‘하리꼬미’를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하리꼬미는 ‘잠복한다’ 는 뜻의 일본어에서 온 은어로, 한국의 언론사에서는 수습기자로 입사하자마자 경찰서 기자실에서 숙식을 하면서 하루종일 기사와 사건을 찾아 수시로 보고하며 생활하는 것을 뜻한다.

당시 ‘캡’이라 불리는 경찰팀장은 닿지 못할 존재처럼 느껴졌다. 하루종일 나에게 혼을 내는 선배는 너무 무서웠다. 언제 전화가 올지 몰라 24시간 잠시도 전화를 떼어 놓아서는 안 됐다. 하지만 여름에 하루 2, 3시간 정도만 눈을 붙이고 종일 일만 하다 보니 너무나 목욕이 하고 싶었다. ‘딱 10분만 씻고 나오자’ 생각하고 전화기를 비닐에 싸서 동네 목욕탕에 갔던 때가 지금도 생생하다.

2주일 정도 그런 생활을 하니 잠이 너무 부족하고 건강도 나빠졌다. 그 와중에 캡은 회식을 열고 소주를 컵으로 마시게 했다. 거의 모든 견습이 회식 후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길바닥에 누워 있다 발견된 동료도 있었다. 나 역시 길에 쓰러져 있다가 어떤 남자에 의해 택시에 태워졌다.

택시기사에게 ‘청량리 경찰서로 간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나는 살았는지도 모른다. 기자실에 도착해 정신을 차린 순간, 나를 태웠던 그 남자가 택시 안에서 내 가슴을 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찰서에 간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어디로 끌려갔을지…. 신문에 실려서 “왜 여자가 술을 정신 잃을 때까지 마시냐” 같은 악플의 희생양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엉엉 울었지만 서너 시간 후 나는 또다시 이를 악물고 전화를 걸고 새벽보고를 하고 경찰서를 돌았다. 선배한테 ‘왜 술 취한 후배를 버려두고 갔느냐’는 항의도 하지 못했다. 당시 나라는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고 완전히 회사에, 상급자에 매여 있었다. 지금까지 인사철마다 지망 부서를 적어 낼 때, 사회부에 한 번도 지원한 적이 없는 이유는 이 때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가 이해가 가지 않는가? 비닐에 싼 휴대폰을 들고 목욕하고, 무려 ‘대선후보’라는 엄청난 지위의 상급자가 ‘담배’ ‘모기향’ 같은 단문 문자만 보내도 바로 사다 바쳐야 하는 몸종 같은 사람의 심리 상태가 사랑이라고?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냐고? 군대에서 선임에게 괴롭힘을 당한 이등병이 항의를 할 수 있나? 수년 동안 지속적으로 교수에게 괴롭힘을 당한 조교의 사건이 알려졌을 당시, “성인인데 왜 항의하고 관두지 않았냐”고 말했던가? 하지만 김지은씨에게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담배를 문 밖에 놔뒀으면 간음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며 피해자 탓을 했다.

사법부는 그동안 성폭력을 당한 사람에게 유달리 가혹했다. 괴로워 손목을 그은 피해자에게 “왜 동맥이 아니라 정맥을 그었냐”고 물어본 판사도 있다고 한다. 성폭력 피해자는 죽음으로써만 피해자성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를 반영하는 것일까. 실제로 “장자연 씨만이 진정한 미투”라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장씨가 죽지 않고 세상에 피해 사실을 알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너도 배역 욕심에 그런 거 아니냐” “왜 즉시 항의하지 않았냐” 같은 악플의 희생양이 되지는 않았을까? 장씨는 법원이, 세상이, 자기를 지켜주지 못할 것을 알고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번 판결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수많은 김지은에게 깊은 좌절을 안겨줬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죽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알리고, 소송을 하고, 시위를 하고, 연대하고 지지할 것이다. 끝까지 살아 나갈 것이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던 하리꼬미는 이번에 입사한 견습기자부터 실시하지 않고 있다. 주52시간 상한 근무제 만세다.

최진주 정책사회부 기자 parisc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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