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될수록 진한 논산의 향기... 선비의 품격 명재고택ㆍ격식 파괴 은진미륵

논산 명재고택 사랑채의 4개 창을 열면 16:9 비율의 와이드스크린이 된다. 대문과 담장이 없어 바깥풍경이 그대로 들어온다. 논산=최흥수기자

제풀에 지친 무더위의 끝자락에 늦여름의 끈적거림과 초가을의 선선함이 교차한다. 오래된 것들에 대한 여운도 다르지 않다. 지겹다고 여길 즈음 또 새롭게 다가온다. 긴장과 경계를 내려놓은 자리에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이 스민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윽한 향기를 더하는 명재고택에서 논산 여행을 시작했다.

16:9 와이드 창으로 들어오는 선비의 품격

명재고택으로 들어서면 사랑채 앞마당의 배롱나무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100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고 해서 백일홍나무라고도 부른다. 올 여름 폭염에 괴로운 건 사람만이 아니었으리라. 가지 끝에 얼마 남지 않은 분홍 꽃송이가 실바람에 살랑거린다. 끝까지 기품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듯하다.

노성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명재고택.
기단이 높아 처마와 서까래가 하늘로 휜 것처럼 보인다.
사랑채 입구 위헤 ‘도원인가’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다.

노성산(348m) 자락 아늑한 터에 자리 잡은 논산 명재고택은 조선 숙종 때 유학자 윤증(1629~1714)의 집이다. 일반적으로 고택(古宅)은 오래된 집을 뜻하지만, 명재고택은 명재(明齋) 윤증과 인연이 있는 옛집이라는 의미로 고택(故宅)이라 표기한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윤증은 이 집에서 기거하지 않았다. 윤증이 세상을 뜨기 5년 전 아들과 제자가 인근 유봉리 초가에서 기거하던 그를 위해 지었으나, 과분하다고 거절하며 끝내 입주하지 않았다. 부친의 뜻이 이러하니 아들도 감히 새집에 들지 못하고, 손자 때부터 거주하게 됐다고 한다.

소론의 영수인 윤증은 노론의 수장 우암 송시열과 사제 간이었지만, 나중에는 개인적 감정과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관계가 틀어졌다. 이러한 연유로 현종 때 내시교관ㆍ공조랑ㆍ지평 등에 제수됐으나 모두 사양했고, 숙종 대에도 호조참의ㆍ대사헌ㆍ우참찬ㆍ좌찬성ㆍ우의정ㆍ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됐으나 사퇴했다. 타협을 거부하며 권력에서도 멀어진 선비의 완고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배롱나무 뒤는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의 사랑채다.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처마와 서까래 끝이 하늘로 단아하게 휘어져 있다. 기단이 높아 실제보다 웅장해 보인다. 그 중에서도 앞으로 돌출한 왼쪽(정면에서 봤을 때) 넓은 방이 돋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그 방에서 창을 열고 내다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4짝으로 된 창 중에서 가운데 2개를 양쪽으로 열어 바깥 창에 포갠 후, 고리를 걸어 위로 올리면 벽면 절반이 가로로 툭 트인다. 시각적으로 현장감을 살리고 안정감을 준다는 16대9 와이드스크린이 눈앞에 펼쳐진다. 정원을 따로 꾸미지 않고 바깥 풍경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한옥의 아름다움, 차경(借景)을 가장 잘 구현한 구조다. 넓은 창으로는 앞마당의 배롱나무와 뒤편 언덕의 솔숲, 그 너머로 노송면의 아기자기한 산세가 액자처럼 걸린다. 이뿐만 아니다. 측면 출입문과 창을 열면 세 방향에서 바람이 들고나서 시각적 효과 못지않게 시원하다. 사랑채 풍경이 넉넉한 또 하나의 이유는 양반집 권위를 상징하는 대문과 담장이 없기 때문이다. 명재고택 바로 옆에는 노성향교가 있고, 반대편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는 노성궐리사가 있다. 향교나 궐리사 모두 공자를 모신 사당이긴 마찬가지인데, 당시 권력 실세인 노론 측에서 이 시설을 이용해 양쪽에서 명재고택에 드나드는 사람을 감시하는 듯해 떳떳함을 내보이기 위해 아예 개방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전해진다.

4개의 문짝을 열면 바깥풍경이 액자처럼 걸린다.
이 풍경은 고택민박을 하는 사람들만 누릴 수 있다. 평시에는 문을 닫아 놓는다.
집은 안 보이고 장독대만…산책로에서 본 장독대는 명재고택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쓰는 이미지다.
개구리밥 가득한 명재고택 앞 연못에 배롱나무꽃이 붉게 떨어져 있다.

명재고택 사랑채에서 내다보는 넉넉한 경치는 고택 민박을 하는 사람들만 누릴 수 있다. 숙박으로 사용하는 만큼 평시에는 문을 닫아놓기 때문이다. 이 집을 지키는 명재의 13세손 윤완식씨는 “집은 뒷전이고 사진가들이 장독대만 자꾸 찍어 간다”며 섭섭함을 토로했다. 실제 인터넷에서 명재고택을 검색하면 장독대를 소재로 한 사진이 절반을 넘는다. 사랑채 옆 마당에 가지런히 정렬한 수백 개의 커다란 장독은 고즈넉한 한옥 풍경을 담는 재료로 부족함이 없다. 명재고택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한 것도 사실이지만, 장독대는 어디까지나 후손들이 고택을 지키기 위한 경제 활동의 일부분일 뿐이다. 고택에서는 관람객들에게 이곳에서 담근 된장과 고추장을 팔기도 한다. 고택 뒤편 산중턱까지는 ‘사색의 길’이라 이름한 산책로를 조성했다. 전망대에서는 소나무 가지 사이로 노성면 들판이 정겹게 펼쳐진다. 왕복 약 20분이 걸린다.

뒤늦게 국보가 된 격식 파괴 은진미륵

문화유산도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은진미륵은 오랜 옛날부터 논산의 상징이었지만, 올해 4월 20일 비로소 국보 제323호로 지정됐다. 정식 명칭은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일반적으로 은진미륵이라 부른다. 관촉사는 논산시 은진면 땅이었다가 지금은 관촉동에 속한다.
은진미륵은 신체 비례가 맞지 않아 보물에 머물렀다가 올해 4월 파격적 미를 인정받아 국보가 됐다.

보물로 지정된 1963년 국보가 되지 못한 까닭과 이번에 국보로 승격된 이유가 같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문화재청은 은진미륵이 “널찍하고 명료한 이목구비와 균제되지 않은 압도적인 크기 등은 한국 불상 중 가장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미의식을 창출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라고 국보 지정 이유를 밝혔다. “우아한 이상미(理想美)를 추구한 통일신라 조각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고 있어 국보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균제되지 않았다, 독창적이다, 파격적이다’ 등은 예의를 갖춰 정제한 표현일 뿐이다. 거칠게 말하면 은진미륵은 신체 균형이 맞지 않아 불상으로서 완결성이 떨어진다는 것과 같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파격과 사실성이 결여됐다는 이유로 국보가 되지 못했다가, 이번에는 바로 그 점이 높이 평가받은 것이다. 하기야 세계적인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도 그 괴기함 때문에 초기에는 혹평을 받지 않았던가.

미적 평가와는 관계없이 논산에서 은진미륵은 오래 전부터 ‘잘생김’의 대명사였다. 김경란 논산 문화관광해설사는 요즘도 어린아이에게 ‘고놈 참 은진미륵 닮았네’라고 하면 지역에서는 최고의 칭찬이라고 한다. 논산에 자연재해가 거의 없는 것도 은진미륵이 굽어 살피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강하다.

은진미륵이 있는 관촉사는 논산 시내에서 동쪽 낮은 산자락에 있어 평지나 마찬가지다. 주차장에서 슬근슬근 걸어 석문을 통과하면 미륵전 우측으로 커다란 불상이 단박에 눈길을 잡는다. 이때부터 다른 전각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18.1m, 아파트 6층 높이의 석불에 저절로 발길이 끌린다. 과장되게 늘어진 귀와 커다란 눈, 몸통과 두상의 비율이 거의 같아 괴기스럽고 위압적으로 보이기도 하련만, 내려다보는 그 눈길이 은은하고 친근하다. 소풍 온 아이들이 더러 ‘얼큰이 부처님’ ‘숏다리 부처님’이라 놀려댈 정도다. 이런 신체의 비대칭은 바로 아래서 쳐다볼 때 오히려 진가를 발휘한다. 원근감에 따른 착시 때문에 실제 인체의 비율과 엇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바로 앞에 있는 석등 사이로 미륵불과 눈이 마주칠 때면 짜릿한 감동이 전해진다. 아침 햇살에 양각이 도드라질 때도 좋지만, 느긋한 여행자에게는 해질녘이 제격이다. 뒤편으로 해가 떨어질 때 부서지는 햇살이 광배처럼 신비롭게 미륵불을 감싸기 때문이다.

불상 앞 석등을 돌다 보면 미륵불과 눈이 마주치는 지점이 있다. 불상만 보면 눈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보이지만 이 위치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인다.
관촉사 미륵전에는 따로 불상이 없고, 통유리창으로 은진미륵을 볼 수 있게 했다.
배례석에 풍성한 3송이 연꽃이 양각돼 있다.

은진미륵은 968년 무렵 공사를 시작해 1006년에 마무리했다. 관촉사 주변에는 이렇게 큰 석상을 세울 만한 돌이 없어 인근 연산면 ‘우두촌’이라는 곳에서 캔 돌을 통나무에 올려 소가 끌고 사람이 밀어 옮겨 왔다. 당시로선 대역사였다. 1,000년의 시간 속에 은진미륵도 자연의 풍파를 겪었다. 부처의 눈썹 사이에서 빛을 발하는 백호(白毫)가 떨어져 조선 중종 때인 1521년에 청동으로 갈았고, 이마저 훼손돼 지금의 것은 1962년 끼운 자수정이다. 떨어져 세 조각난 백호에는 관세음보살의 진언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옴마니반메훔’의 첫 글자인 ‘옴’자가 새겨져 있는데,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머리에 2개의 덮개 돌을 얹은 것도 은진미륵의 특징이다. 이 때문에 예전부터 관직에 뜻을 둔 사람들의 기도 장소로 소문나 있다. 미륵불 뒤편 갈라진 바위마다 시주한 불자들의 이름이 빼곡한 것도 그 때문이다. 거대한 불상에 눈이 팔려 놓치기 쉬운 유물 하나가 미륵불 앞 배례석의 연꽃 문양이다. 보통은 한 송이를 음각하는데 관촉사 배례석에는 크기도 풍성한 3송이가 양각돼 있다. 정면에 작은 석탑이 은진미륵을 막고 있어 다소 아쉽다.

논산=글ㆍ사진 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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