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룬힐데 폼젤 ‘어느 독일인의 삶’

증언에 나선 괴벨스의 비서 브룬힐데 폼젤. 그는 전쟁의 실체에 대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열린책들 제공

“첫 월급 명세표를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무려 270마르크나 되더라고요. 정말 월급이 많았어요. 다른 친구들은 150마르크 이상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어요. 다들 나를 부러워했죠. 거기다 정부 부처 근로 수당 60마르크, 이것도 세금을 떼지 않았어요. 장관직 수행 특별 수당 50마르크, 이것도 당연히 세금을 떼지 않았어요.”

“아무튼 난 남들보다 지내는 형편이 괜찮았어요. 약간 선택 받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일하는 것이 만족스러웠어요. 모든 것이 편했고 마음에 들었죠. 쫙 빼 입은 사람들, 친절한 사람들. 그래요, 난 그 시절 껍데기로만 살았어요. 어리석게도요.”

1911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어렵지는 않았으나 엄격한 집안이었다. 유대인 문제? “1933년 이전에는 누구도 유대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순전히 나치에 의해 만들어진 거죠.” 인테리어 업자였던 아버지는 돈을 후하게 쳐주는 유대인과의 거래를 좋아했다. 차려 입고 출근하는 여자들이 멋져 보였다. 속기와 부기를 배웠다. 그래서 얻은 자신의 첫 직장도, 다음 직장도 유대인 회사였다. 대우도 좋았고 일도 적당했다.

우연히 소개받은 나치당원 불프 블라이가 시발점이었다. 그를 통해 제국 방송국 일자리를 얻었고, 1942년에는 마침내 나치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1897~1945)의 속기 타자수 겸 비서가 됐다. 자그마한 덩치나 생김새가 유대인 같아서 그를 싫어하는 나치도 있었다던데 말이다.

그의 이름은 브룬힐데 폼젤. 패전 뒤 소련의 특별수용소 2호에 ‘47번’으로 수감됐다. 부헨발트 수용소, 그러니까 나치가 생체실험과 독가스 등으로 5만, 6000여명을 학살한 그 수용소 부지에 마련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 설치를 지시한 사람은 이번엔 스탈린의 오른팔 라브렌티 베리야였다. 5년 뒤 24마르크를 손에 쥐고 석방됐다. 그리곤 긴 침묵이었다. ‘어느 독일인의 삶’은 이 60여년의 침묵을 깨고 2013~2014년 내놓은 폼젤의 증언을 정리한 책이다. 2017년 106세로 사망할 때까지 나치에 대해 얘기한 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젊은 시절의 브룬힐데 폼젤. 속기 기술이 뛰어나 상사들이 선호했다. 열린책들 제공

폼젤의 증언은 베를린 보통 사람의 증언이다. 1차 대전 이후와 나치의 부상을 바라보는 당시 독일의 분위기도 흥미롭다. 특히 폼젤은 히틀러에 이어 괴벨스까지, 나치 주요 인사들이 자살하는 와중에도 총통 벙커 옆 지하실에 머물렀고, 최후의 순간 식량 포대를 찢어 소련군에 항복할 백기를 만들었던 인물이다. 소련군이 압박해 들어오던 그 순간 베를린 최후의 모습을 아주 선명하게 묘사해낸다. 괴벨스와 가족들, 개인비서 프로바인 등 괴벨스 주변 인물들 얘기도 재미있다.

그래도 폼젤의 증언이 주목받는 건 역시나 ‘역사적 책임’ 문제일 것이다. 아, 물론 폼젤에게 절대적 책임을 요구하는 건 과하다. 고위 장교도 아니고 비서이자 속기사인데 말이다. 문제는 그 시절에 대한 폼젤의 진술 방식이다. 그래서 이 책은 통째로 불편한 책이다. 폼젤이 내놓은 진술방식이, 우리의 흔하디 흔한 이런저런 변명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 증언이 공개됐을 때 폼젤에 대한 비난이나 경멸은 없었다 한다. 비난은 커녕 아마 먹먹했을 것이다.

“그저 난 항상 의무감이 투철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줬어요. 그만큼 성실하게 잘 했고, 항상 정확했어요. 어떤 자리에 있건 나는 내가 많은 일을 충실히 완수했어요. 평생 그랬죠. 당시도 물론이었고요. 그 일이 나쁜 일이건 좋은 일이건 상관없었어요.”

“사실 그런 격동의 시절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어요. (중략) 우리는 그저 시대에 끌려 다녔을 뿐이에요.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완전히 잘못된 예언으로 사람들을 호도한 나치 자신들, 즉 나치 지도부만 빼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이었어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나 계층만의 무관심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날에도 늘 반복해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무관심을 말하는 거에요.”

유대인 학살은? 강제이주 행렬을 보면서 “체코의 빈 독일 촌을 채우기 위해 데려가는 것이라고들 했었어요.” 백장미 사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같은 반(反) 나치 운동에 대해서는? 동정하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 사람들도 어리석었죠. 어떻게 그런 일을 계획할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그냥 입을 다물고 살았더면 지금도 살아 있지 않겠어요? 그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그랬어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한 때는 내 속에도 이상주의가 있었겠지만, 그로 인해 나한테 피해가 생길 정도로 이상주의를 지키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런 증언 중간중간 폼젤이 추임새처럼 반복하는 말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다. “괜히 알게 돼서 부담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고도 한다.

어느 독일인의 삶
브룬힐데 폼젤 지음ㆍ토레 한젠 엮음ㆍ박종대 옮김
열린책들 발행ㆍ328쪽ㆍ1만5,000원

폼젤의 증언을 기록한 정치학자 토레 한젠은 폼젤의 증언을 통해 극우 포퓰리즘의 가능성을 경계한다. 극우 포퓰리즘의 토대는 포퓰리스트 주변을 어슬렁대는 과격하기만 할 뿐 멍청한 일부 지지자들이 아니다. 그보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항상 자기 자신의 성공과 물질적 안정만 생각하고, 사회적 불의와 타의에 대한 차별에는 둔감한 수백만명의 폼젤”이다. “직장과 물질적 안정, 상관에 대한 의무감, 상층부에 속하고 싶은 욕망이 우선”인 사람들이었다.

이 질문은, 이 고민은 독일, 미국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날아온다. ‘나쁜 사람은 없다, 나쁜 상황이 있을 뿐’이란 말에 동의하는가. 뭘 그렇게 꼬치꼬치 따져대냐, 훈훈하게 화해하자는 건데, 라고 돌아서는 우리 얼굴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던 폼젤의 얼굴과 겹치는 게 아닐까.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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