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력이라 함은 피해자의 자유 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을 말하고,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묻지 않으므로 폭행, 협박뿐 아니라 행위자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대법원이 2005년 미성년자를 위력으로 간음해 기소된 사건 판결에서 밝힌 위력의 정의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 선고를 앞두고 가장 큰 관심은 ‘위력’의 인정 여부였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위력의 존재와 행사를 구분해 무죄 결정을 했다. 위력은 존재했으나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분리가 가능한지가 논란이다. “위력의 존재가 곧 행사 아니냐” “위력이 어떻게 표현돼야 행사됐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뒤따른다.

▦ 위력의 존재보다 행사에 비중을 두면 ‘물리적 저항이나 피해 입증’이 잣대가 된다. 지금까지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가 적용된 경우는 미성년자, 장애인이고 성인이 거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판부가 언급한 대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중요시한 때문이다. 하지만 일종의 착취적 관계가 형성돼 있으면 가해자는 굳이 위력을 행사할 필요가 없고, 피해자는 자포자기 상태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특징이 있다. 김지은씨는 “(비서로서) 일할 때 거절하거나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때 머뭇거렸던 건 저한테는 최대한의 거절이었다”고 했다.

▦ 성인에겐 위력 여부를 엄격하게 해석한 판례가 확립된 상황에서 재판부의 입장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생소한 ‘노 민스 노 룰’(No Means No rule)을 거론한 것도 고민의 일단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남성 위주의 억압적 사회구조 탈피 요구가 높은 현실도 감안해야 하지 않았는가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법이 아무리 현실보다 늦다고 하더라도 시대 상황을 반영해야 진정 ‘살아 있는 법’이 된다. 홍대 누드모델 몰카 사건에서 재판부가 벌금형이나 집행유예가 주를 이뤘던 것과는 달리 징역 10개월을 선고한 것과도 비교된다.

▦ 이번 판결을 계기로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처벌하도록 법 개정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영국, 독일, 스웨덴 등에서는 명백한 동의가 없는 성관계를 강간으로 간주하는 법이 시행되고 있고, 우리 국회에도 관련 법안이 발의돼 있다. 올해 초 권력형 성범죄에 대한 ‘미투 폭로’가 잇따르자 의원 53명이 ‘비동의 간음죄’를 신설하는 법안을 내놨다. 이젠 상대방의 거절 의사 표시에 반드시 귀 기울이는 게 상식이 돼야 한다.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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