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주니어 제공

이 그림책은 이성을 잃은 법관의 파국을 그리고 있다. 파국은 “온다!”는 진술을 무시하고 탄압하는 데서 비롯된다.

표지를 열면, 판사 하나 근엄하게 앉아 있다. 이어 그 앞에 끌려온 ‘죄인’이 진술한다. “판사님, (...) 본 대로 말한 것뿐이에요. 무시무시한 괴물이 오고 있어요. 날마다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어요. 험상궂은 눈을 부라리고 다니고요, 꼬리털이 북슬북슬해요. 아, 판사님, 이제 기도하는 수밖에 없어요!” 판사가 선고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장 감옥에 처넣어라!”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죄인’의 진술도 한결같다. “괴물이 온다!” 험상궂은 눈, 북슬북슬한 꼬리, 길고 뾰족한 발톱. 잡아먹을 듯 입을 쩍쩍 벌리고, 으르렁그르렁 소리를 내고, 돌멩이도 우둑우둑 씹어 먹으며, 커다란 날개가 달렸고, 화르르 불도 내뿜는단다. 진술이 거듭될수록 괴물의 형상은 또렷해지고, 판사의 선고는 더 거칠어진다. “머리가 이상한 게 틀림없다”, “감옥에 가두고 열쇠를 버려라!”,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두어라!”, “거짓말쟁이! 머저리! 멍텅구리! 얼간이!”...

이처럼 무시되고 탄압받은 “온다!”가 역사에 숱하다. 왜적, 청군, 양이, 제국주의, 미륵, 개벽, 혁명,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 어떤 것은 결국 와서 파국을 초래했고, 어떤 것은 기어이 와서 권력을 끌어내렸다. 어떤 것은 여전히 오지 못해 속을 태운다. 어떤 “온다!”든, 권력은 외치는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었다. 어떻게 그리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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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문호 루쉰이 ‘왔다!’라는 글을 썼다. 글 속에서 군벌 중국의 언론과 자본과 관리와 검찰당국은 “과격주의가 왔다!”고 떠들어댄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과격 단체 결성 여부를 엄중조사’한다. 글은 거기까지 말하지만, 감시하고 조사한 뒤에는, 처넣었다.

우리 역사에도 수많은 “왔다!”가 있다. “빨갱이가 왔다!”, “안보위기가 왔다!”, “북한군이 왔다!”, “의식화가 왔다!”, “과격불순세력이 왔다!”... 권력은 그렇게 겁박하며 양민을 학살하고 민주제도를 말살하고 학생과 지식인을 잡아가두고 노동자와 철거민을 사냥하고 국정을 농단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엇을 챙겼는가, 그리고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그림책의 결말은 이렇다. ‘미치광이들이 왔다’며 판사가 사람들을 마구 처넣는 사이, 괴물은 창밖에 다다랐다. 급기야 법정의 문을 열고 들어와, 판사를 덥석 물어 씹어 삼켜 버린다.

거칠게 말하자면, 역사는 “온다!”고 외치는 자와 “왔다!”고 떠드는 자의 싸움이다. 이 그림책이 보여주는 것은 그 싸움의 한 양상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근래에 드러난 ‘사법농단’의 복잡한 속내가 정리된다. 고위 법관들이 “온다!”는 진술의 진위를 꼼꼼히 따져보는 상식 판사들을 감시하면서 부당한 판결로 정권과 거래해 온 행태의 근저에는 “왔다!”고 떠들며 기득을 지키는 권력의 카르텔이 있다.

어리석은 판사
마고 제마크 그림∙하브 제마크 글∙장미란 옮김
시공주니어 발행∙48쪽∙8,000원

그렇다면 책 속의 ‘어리석은 판사’는 ‘어리석은’ 판사도 아니고, ‘판사’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들의 판단이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좌우하는 모든 권력들의 아바타인 것이다. 그래서인가, 이 책의 원제는 ‘The Judge’, 그냥 ‘판사’다.

그러니 이 그림책은 “온다!”고 외치는 이들을 “왔다!”로 몰아붙여 핍박하고 잇속을 챙기는 모든 권력에게 보내는 경고다. 그러다간 결국 오고야 만 괴물에게 씹어 먹힐 것이라는.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판사를 우둑우둑 씹어 먹는, 그러나 누추한 죄수들은 손끝 하나 건들지 않는 저 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김장성 그림책 작가∙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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