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실장 공관서 회동 기록ㆍ진술
강제징용 재판 지연ㆍ뒤집기 요구
대법, 5년간 확정판단 미루고
‘요구사항’ 법관 해외파견 재개돼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와 법원행정처의 재판거래 의혹에 개입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다. 홍인기 기자

김기춘(79)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재직 시절 차한성(64) 당시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을 만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의 일본 전범기업 상대 한 민사소송을 놓고 거래를 한 구체적 정황이 드러났다. 청와대와 대법원 최고위층이 직접 머리를 맞대고 뒷거래를 시도한 구체적 정황이 드러나면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가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14일 검찰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신봉수)와 특수3부(부장 양석조)는 2013년 12월 1일 일요일 오전 김 전 실장이 차 전 대법관을 서울 종로구 삼청동 비서실장 공관으로 불러들여 회동한 기록과 관계자 진술 등을 확보했다.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도 이 자리에 배석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자리에서 김 전 실장은 최대한 확정판결을 지연시키거나 대법원 소부(小部)에 배당된 해당 재판을 전원합의체로 재배당해 기존 판결을 뒤집을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1ㆍ2심은 피해자 패소 판결을 내렸지만, 2012년 5월 대법원 소부는 종전 판결을 뒤집고 사상 최초로 일본 전범기업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2013년 8월 대법원 판단대로 하급심이 결정을 내려 다시 대법원에 재상고되자, 대법원 입장이 180도 달라졌다.

이미 대법원이 심리를 마쳤고 쟁점은 동일한 사건이라 앞서 심리한 취지에 맞게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을 내리는 것이 통상적이었지만, 대법원은 5년간 결론을 내지 않다가 사법농단 사태가 불거진 최근에서야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

당시 대법원 측은 청와대의 ‘지연 또는 결론 뒤집기’ 요구에 응하는 대신 법관의 해외 파견을 지속적으로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끊겼던 해외 파견은 김 전 실장과 차 전 대법관 회동 이듬해인 2014년부터 재개됐다. 검찰은 대법원이 재판을 미루고 행정부가 해외 파견을 되살린 이런 일련의 과정을 양측의 ‘거래’가 실제로 성사된 행위로 보고 있다. 이날 소환된 김 전 실장 역시 만난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당시 ‘왕실장’으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자랑했던 김 전 실장이 대법관과 외교부 장관을 불러 비밀리에 만남을 주재한 것으로 미루어 박근혜 청와대가 조직적으로 양승태 대법원과 재판 거래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강제징용 소송에서 피해자들이 승소할 경우 대일 관계에 지장이 생길 것으로 판단, 우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필요할 경우 박 전 대통령도 불러 조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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