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필자 아버님의 미수(米壽) 잔치를 위해 독일에서 막내 여동생 가족이 왔다. 여동생은 독일인과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조카들 중 2명은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김나지움에 다니고 막내는 초등학생이다. 나는 오랜만에 조카들과 시간을 보냈다. 나는 명색이 교수랍시고 무얼 자꾸 가르치려 든다. 나는 16살 조카에게 물었다. “너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 이 질문의 내면에는 “너 어느 대학으로 진학할래?” 혹은 “너 무슨 전공을 해야 좋은 직장에 가는 줄 알아?”라는 세속적이며 건방진 마음의 숨어있었다. 조카는 내 질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한참 주저하다가 자신이 지금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과목들을 나열하기 시작하였다. “저는 이번 학기에 지리, 물리, 경제를 배워요. 그리고 핸드볼 선수였는데, 무릎을 다쳐 수술해 지금은 운동하지 못해요.”

나는 조카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는데, 조카는 나에게 자신이 지금 당장하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지금(只今)’의 중요성을 로마시인 호라티우스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라틴어 문구를 인용하며 강의하지만, 실제로는 조카에게 먼 미래를 질문한 것이다. 그의 대답에 당황한 것은 나였다.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소홀하게 지나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조카는 경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독일 경제가 처한 딜레마를 한참 설명하는데, 내가 아는 바가 없어 그저 듣기만 했다. 나는 멋쩍어 한 반 학생 수를 물으니 조카는 16명이라고 말했다. 조카는 16명 학생들과 모두 친하며 각 학생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과목을 정해, 매 시간 이동하여 수업을 듣는다고 말했다. 조카가 말하는 내용마다, 교육전문가를 자처하는 내 ‘교육관’과 사뭇 달랐다.

조카에게 잘난 체하려는 마음으로 나는 한국인들만이 할 수 있는 황당한 질문을 던졌다. “너 어느 대학 갈래? 베를린대학도 좋고 하이델베르크대학도 좋은데. 대학졸업 후, 막스플랑크 연구소 가면 좋겠다.” 내가 가본적도 없고 알지도 모르는 대학이름을 찬란하게 나열하였다. 조카는 이전보다 더 당황한 얼굴로 대답하기를 머뭇거렸다. 그의 얼굴 표정은 허망했다. 그는 분명 내 질문을 이해 못했거나, 내 허황된 질문에 할 말을 잃었거나, 혹은 이런 질문을 하는 삼촌에 대한 실망한 얼굴이었다. 그는 이전보다 더 긴 휴지(休止)를 두고 힘들게 말을 꺼냈다. “삼촌, 저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김나지움 졸업하고 1~2년 외국에 나가 돈을 벌면서 일하려고요.” 그의 대답은 대화의 상대자인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의 정신세계는 나를 출구가 없는 미궁에 잡아놓은 미노타우로스와 같았다.

나는 잠시 1970년대 말,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선진국 독일과 후진국 한국의 교육을 비교하는 것이 서글펐다. 그 때 한 반에 시커먼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학생 70명이 우글거렸고 한 학년이 7반이었다. 나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성적과 전교순위는 교실입구에 대문짝만하게 붙어, 가뜩이나 쪼그라든 자존심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어머님은 무슨 죄인이라고 된 것처럼, 담임선생의 호출을 받아 고개를 조아렸다. 당시 계엄령이 선포되어, 길거리에는 군인들과 탱크가 보였다.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조카에게 물었다. “친구들도 다 그렇게 하느냐?” 이 질문도 역시 허접했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그는 대답했다. “친구들마다 하고 싶은 게 달라요. 어떤 친구는 대학에 바로 진입하고, 어떤 친구는 바로 일하겠대요. 저처럼 일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는 친구들도 있어요.”

조카가 나에게 질문을 역습했다. “삼촌, 내가 정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요?” 나는 말했다. “일 년 동안 세상 경험했으니, 이젠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학가겠지.” 그의 대답은 다시 나의 허를 찔렀다. “내가 1년 동안 알바에서 모은 돈으로 유럽과 미국 전역을 여행 할거여요. 한번밖에 없는 내 인생을 위해 무엇을 할지 여행하며 고민하려고요.”

교육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스스로 깨닫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다. 교육은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다양한 답이 있으니, 자신에게 알맞은 답을 찾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시민대표라는 사람들이 모여 대학입시 정책을 정한다고 모였다. 이기적인 인간들이 모였으니, 합의가 도출될 리가 없다. 학력고사를 치른 후에, 한 방송국의 수업내용에서 입시시험문제가 얼마나 나왔는지 발표한다. 입시학원과 그 인터넷 방송들은 높은 점수를 획득할 수 있는 비법이 있다며 학부형들과 학생들을 홀려 시간, 돈, 그리고 그들의 운명을 낚아챈다. 후진국들도 하지 않는 중고등교육을 우리가 자행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 11위 경제대국이라지만, 교육수준은 자살률, 출산율지표가 증명하는 것처럼, 후진국이다. 교육(敎育)은 회초리로 학생들을 다그쳐 빨리 많이 외우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 핸드폰 안에 세상이 모든 지식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교육하다’라는 영어단어 ‘에두케에트(educate)’의 어원이 지시하는 것처럼, ‘교육’은 학생들이 각자 지니고 있는 고유함을 자극하여, 그것을 ‘밖으로’(e-) ‘끄집어내는’(-ducate) 거룩한 수련이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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