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오늘 황산벌전투가 벌어졌다. 사진은 2003년 영화 '황산벌' 포스터.

660년 8월 20일 백제와 신라-당나라 연합군의 마지막 전투인 황산벌전투가 벌어졌고, 백제 대장군 계백(階伯)과 결사대 5,000여명이 대부분 전사했다.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 5만 명 중에서도 다수가 전사했을 것이다. 한반도 왕조의 부침사(浮沈史)에서 백제의 패망은 도드라지게 극적이었다. 그 클라이막스가 황산벌 전투였고, 주역이 계백이었다. 통일신라와 중세의 고려가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다수의 정ㆍ야사를 통해 저 전투와 계백을 조명한 까닭은 자명하다. 그는 충절의 화신이었다. 신채호 같은 구한말 일제 치하 식민지 지식인들이 그의 역사를 부각한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당시는 국가(조정)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이들이 필요했다.

해방과 건국 이후, 특히 군사정부가 전국 방방곡곡에 이순신을 비롯, 장군의 동상들을 일삼아 세운 것도 같은 이유였다. 계백의 동상은 황산벌이 포함된 충남 논산의 군사박물관에 서있고, 유적 전승지가 있고, 그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과 서원이 있다. 그는 정치인이자 공직자로서, 또 무엇보다 군인으로서, 포로로 살아남아 새로운 벼슬을 누린 다른 이들과 달리 목숨을 던져 명예를 지키려 했던 드문 인간이었다.

물론 그가 지키려 했던 명예와 가치를 판단하고 또 그것들을 위해 그가 난폭하게 외면했던 다른 가치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다. 계백이 지키고자 했던 의자왕체제의 백제, 가족을 스스로 살해함으로써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그것들이다. 상비군이 없던 시대였으니 그의 결사대는 평시의 농부나 상인이었을 것이다. 고위 관료인 그와 무명의 그들이 선택의 순간에 서야 했던 자리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할 것들이 있을 것이다. 21세기의 우리에게는 다양한 저울이 있고, 각자의 눈금이 다 다르다. 그 다름이 미덕이고, 민주주의의 바탕이다.

직분을 무겁게 여겨 의지로써 목숨까지 내놓은 계백의 선택은, 그 자체로써 충분히 기릴 만하다. 다만 기림의 형식과 내용이 고대, 봉건 왕조와 한말,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그것으로부터 거의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문제다. 21세기 한국사회에는 수많은 미시종교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각기 반성적 사유를 허용치 않는 성역들을 유지하고 있다. 세금으로 유지ㆍ운영되는 것들도 꽤 많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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