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민주주의 시대로] <3> 블록체인 정당 민주주의에 활력을 불어넣다

스페인 정당 포데모스의 돌풍
블록체인 접목한 온라인 투표
공천∙정책결정∙집행부 선출까지
당원이 직접 참여하는 길 열려
좌파 정당, 원내 3당으로 약진
“매일 정당 앱에서 싱싱한 투표
지금은 정치가 일상이 됐어요”
크라우딩 펀딩 통해 후원금 등
적극적 정치 참여로도 이어져
[저작권 한국일보]지난 6월28일 스페인 마드리드 시내에 위치한 포데모스 사무실 '라 모라다'에서 지지자들이 깃발을 들고 포데모스 당명의 의미인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마드리드=강유빈 기자 /2018-08-09(한국일보)

5월 스페인 마드리드의 광장은 탄핵 열기로 뜨겁게 달궈졌다. 한쪽 편에선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가 집권 7년 만에 불명예 퇴진 위기에 몰렸다. 여당인 국민당(PP)의 부패 스캔들이 도화선이었다. 다른 한쪽 편에선 총리 탄핵에 결정적 역할을 한 좌파정당 포데모스(Podemos)의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대표 탄핵 논란이 뜨거웠다. 말총머리를 한 급진좌파 정치인이어서 ‘스페인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로 불리는 이글레시아스 대표는 서민층을 대변한다면서 마드리드 인근에 우리 돈 7억7,000여만원 상당의 고급빌라를 매입한 사실이 알려져 ‘위선자’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블록체인 기술을 바탕으로 한 포데모스의 ‘아고라보팅(Agora Voting)’이 벼랑 끝에 선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다. 라호이 총리는 하원이 6월 1일 불신임안을 가결하면서 스페인 역사상 첫 탄핵된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탄핵안은 안건을 발의한 사회당(84석)에 제3당인 포데모스(67석)가 가세하면서 전체 350석 중 찬성 180표로 통과됐다. 포데모스는 하원 표결에 앞서 사회당의 탄핵 추진에 동참할지를 묻는 아고라보팅을 실시했다. 50만명에 가까운 지지자가 참여해 99%의 압도적 찬성 의사를 표했다.

반면 이글레시아스 대표는 스스로 재신임을 묻는 아고라보팅을 자청하는 정치적 승부수를 띄워 기사회생했다. 5월 28일 치러진 재신임안 표결에서 68.4%가 지지 의사를 밝혔다. 포데모스의 시민 자문위원 알베르토 살라자르(43)씨는 마드리드의 포데모스 지역사무실 겸 당원 교류센터 ‘라 모라다(La Morada)’에서 기자와 만나 “정책 투표의 경우 15만명 정도가 투표하는데 대표 불신임안은 무려 18만명이 참여했다”고 말했다.

대표 불신임도, 총리 탄핵도 시민 손으로...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포데모스에서는 지지자가 원한다면 어떤 문제든 당의 공식 안건이 될 수 있다. 선거에 나설 후보를 공천하는 문제나 당 지도부를 포함한 당직자 선출은 기본이다. 주요 정책 현안과 관련한 당론도 철저하게 지지자의 의사에 따르는, 말 그대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다. 살라자르씨는 “저도 아고라보팅 투표를 거쳐 지지자를 대표하는 시민 자문위원이 됐다”며 “지역 서클의 리더는 몇 명이나 둘지, 심지어는 투표용지에 당 로고를 넣기 원하느냐 여부까지 투표로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정한다”고 설명했다.

정당활동 참여가 늘게 되면서 지지자들의 일상도 바뀌고 있다. 마드리드 동부 카니예하스에 사는 직장인 마리벨 에스테반(44)씨는 출근 전 포데모스 정당 앱에 접속하는 것으로 일상을 시작한다. 싱싱한 활어처럼 매일같이 올라오는 당내 투표안건을 확인하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 재미가 적지 않다. 지역 지지자들이 모인 ‘서클’의 대표자를 뽑는 일부터 국회의원 신임투표, 각종 정책 당론을 결정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안건의 종류는 그야말로 가지각색이다. 에스테반씨는 “과거 내게 정치란 4년에 한 번 투표장에 가는 것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일상이 됐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게 2014년 1월 포데모스가 창당된 이후 4년간 나타난 변화들이다. 신생정당 포데모스는 시민ㆍ정당 민주주의를 앞세워 스페인 정치권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의원이나 당직자는 아고라보팅 결과를 왜곡 없이 현실 정치에 반영하는 것으로 역할을 한정할 정도로 국민주권을 강조한 게 주효했다. 의원ㆍ당직자의 역할을 줄이자 지지자들이 반응했다. 일상적으로 모이고, 토론하고, 공부하면서 시민 스스로 정치적 힘을 모아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포데모스는 창당 100일 만에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120만 표를 얻어 5석을 거머쥐며 주목을 받았다. 이듬해인 2015년 스페인 총선에서는 69석을 차지해 원내 제3정당으로 올라섰다.


스페인 포데모스 정당 지지자들이 지난 6월 28일 마드리드 시내에 위치한 당 사무실 '라 모라다'에서 한국일보 기자와 만나 블록체인 투표시스템 '아고라보팅'에 대한 생각을 설명하고 있다. 마드리드=강유빈 기자/2018-08-09(한국일보)
암호화, 탈중앙화된 투개표 과정… “전적으로 신뢰해”

포데모스가 가진 힘의 원천은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한 온라인 투표시스템 아고라보팅이다. 16세 이상 국민이라면 당원 가입 여부에 상관 없이 신분증 사본을 제출하고 유권자로 등록할 수 있다. 최초 등록 이후부터는 간편한 로그인ㆍSMS 인증 절차만으로 투표창 접근이 가능하다.

블록체인 기술로 구현한 보안성과 탈 중앙화된 시스템이 신뢰를 높여준다. 구체적으로 당원 투표 내용은 암호ㆍ익명화 과정을 거쳐 서버에 저장되고, 투표자 개개인에게는 자신의 표를 추적할 수 있는 무작위의 코드가 부여된다. 이 코드를 입력하면 투표자는 자신이 참여한 투표가 어느 단계까지 진행됐고, 참여자는 몇 명인지, 내가 던진 표는 현재까지 해당 선택지에 몇 퍼센트나 기여하고 있는지 등의 통계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투ㆍ개표 전 과정이 유권자에게 투명하게 공유되는 것이다.

은행에서 근무하다 1년 전 정년 퇴임하고 포데모스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후안 안토니오 모렐로(67)씨는 “투표함이 통째로 바뀌곤 했던 과거에 비해 투표 전 과정이 투명하다”며 아고라보팅 시스템을 훨씬 더 신뢰한다고 말했다. 해킹 가능성에 대해서도 “세금 등 각종 행정민원은 이미 전자화시켜 잘 운영하고 있으면서 투표만 겁내는 건 모순적”이라고 반박했다.

유권자가 일상적인 권력의 감시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블록체인 기술이 쓰인다. 포데모스는 ‘투명성’ 홈페이지를 따로 개설해 소속 의원 별 활동 일지, 정치자금 사용처 등을 소상히 공개하고 있다. 지지자들은 잘못을 저지른 의원을 신임위원회에 직접 신고할 수도 있는데, 신고가 접수되면 위원회 차원에서 진상 조사를 진행해 징계 여부를 결정한다. 에스테반씨는 “아고라보팅으로 재신임 투표에 부치는 것이 가장 일반적 처분”이라고 귀띔했다.

‘내가 만든 정당’… 유료 후원도 선뜻

자신들의 의견이 당의 운영과 정책에 반영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시민들은 지속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강력한 동기를 부여 받는다. 특히 탄핵 등 대형 이슈를 거치며 이들이 느끼는 정치적 효용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 포데모스 지지자 카르멘 캄포스(66)씨는 “당 대표든, 총리든 내가 그 사람에게서 마음을 거두면 언제든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살라자르씨는 “모든 것에 참여해 전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포데모스는 ‘내가 만든 정당’ 같다”면서 “커다란 가족의 일원이 된 듯한 소속감을 준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라고 강조했다.

투표로 증진된 정치적 효용감은 보다 적극적인 정치참여로 이어진다. 아고라보팅 참여자들이 금전적 후원에도 적극적인 이유다. 정책 크라우드펀딩 등을 통해 소액의 후원금을 내고 있다는 캄포스씨는 “나는 당직자도, 정치인도 아니지만 스스로 포데모스의 모든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돼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드리드=강유빈 기자 yub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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