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진정한 지도자 상

1890년 에드워드 포인터의 그림 '솔로몬 왕을 찾아온 시바 여왕'. 시바 여왕이 찾아올 정도로 솔로몬 왕의 명성은 드높았다. 그러나 그림에서 짐작할 수 있는 화려함 때문에 그의 사후 나라는 둘로 갈라졌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고, 보좌관이나 전용차가 없이도 일을 열심히 한다는 북유럽의 국회의원들이 우리 국민들 사이에 화제가 된 바 있다. 겉으로 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오죽하면 우리 국민들이 그들을 경외할까 하는 생각에 씁쓸하다. 민생 현안이 산적해 있어도 꿈쩍없이 정쟁만 해대고 자기네들 신상 현안만 잘 챙기는 ‘기름진’ 국회의원들 때문에, 이 한 여름의 더위가 우리를 더 열 받게 한다.

선거철이면 우리에게 다가와 국민을 섬기는 ‘종’이 되겠다며 연신 굽실거리고 큰절도 올린다. 하지만 일단 여의도에 입성만 하면 달라진다. 더 큰 문제는 우리 국민이 이들의 기만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고 그리 놀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참 바보다.

속고 또 속아 바보이지만 진짜로 바보인 것은, 우리가 북유럽의 자전거 타는 국회의원들을 존경한다는 것이다. 정말 존경해야 할 대상은 사이클링 국회의원들이 아니다. 그런 국회의원들을 만들어낸 북유럽의 국민들이다. 성자 같은 국회의원을 선출시키려 하기 보다는, 어느 누가 국회의원이 되어도 국민의 신실한 ‘종’이 될 수밖에 없도록 그들을 조련시킬 방도를 그들로부터 배워야 하지 않을까?

으뜸 위정자는 종이다

나라의 위정자가 되는 것은, 사회구조상 ‘으뜸’이 되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민주 사회에서는 그럴 자질이 있는 훌륭하고 존경받을 사람을 선출하여 ‘으뜸’의 역할을 하도록 허락한다. 그 위치는 국민이 부여해준 신성한 특권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다. 하지만 민주사회에서는 그 권력이 국민을 ‘섬기는’ 역할과 결과물을 창출해야만 한다. 그래서 의미상, 민주사회의 ‘으뜸’인 위정자들은 국민을 섬기는 ‘종’이어야만 한다.

흥미롭게도 예수는 정확히 이와 같은 철학을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어느 날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자기들 가운데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다.”(누가복음 9:46)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가 말했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가복음 10:43)

예수가 오기 전, 고대 이스라엘 왕국에서도 위정자의 삐뚤어진 특권의식과 권력행사를 견제하려던 시도가 있었다. 소위 ‘왕의 법’을 제정하였는데, 왕을 깐깐하게 견제하자는 취지다. “왕이라 해도 군마를 많이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되며, 군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이집트로 보내서도 안 됩니다.”(신명기 17:16) 군마면 지금의 군사 관련 자산일 것인데, 넉넉하면 좋은 것 아닌가? 분명 그 자산이 나라를 지키는 것 보다는 왕의 아성만 쌓는 것으로 악용되려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 같다.

이 법은 왕의 정책뿐만 아니라 개인사도 견제한다. “왕은 또 많은 아내를 둠으로써 그의 마음이 다른 데로 쏠리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자기 것으로 은과 금을 너무 많이 모아서도 안 됩니다.”(17:17) 권력이 있으니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것도 쉬웠을 것이다. 무소불위의 힘으로 탐하는 것이 많았으니, 마음이 서민들의 애환에 갈 리 만무했다. 권력의 최고봉에서 지나치게 개인적 향락을 누리다가 왕정에서 일탈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섬기는 사람의 위대하다

신정국가답게 왕이 하늘의 뜻을 잘 받들어 치정할 수 있도록 왕에게 신앙교육을 시키자는 법안도 제의한다. “왕위에 오른 사람은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되어 있는 이 율법책을 두루마리에 옮겨 적어,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으면서, 자기를 택하신 주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과 규례를 성심껏 어김없이 지켜야 합니다.”(17:18-19) 지금으로 보자면 청와대와 여의도에 있는 위정자들에게 정규적으로 ‘국민윤리’ 과목을 수강하게 하자는 법안이다.

왕에게 이런 재갈을 물려서 “마음이 교만해져서 자기 겨레를 업신여기는 일도 없고, 그 계명을 떠나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도” 않도록 하였다.(17:20) 권력으로 지나치게 흥이 나면 국민을 우습게 알고 강대국 앞에서 쉽게 매국적 행위도 할 수 있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권력의 단맛을 보면 빠지지 않을 수 없나 보다. 피할 수 없는 그 속성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그렇게 강제적으로 왕의 고삐를 죄는 법안을 제안 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12명밖에 되지 않는 예수의 제자들이지만, 그 안에서도 ‘반장’이 되고자 서로 다투었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또 다그쳤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마가복음 10:43) 진정 으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최고의 윤리적 가르침이다.

구약의 ‘왕의 법’이 던지는 권력자에 대한 비판은 신앙의 조명아래 이루어졌다. 공동체 전반의 복리를 돌보지 않은 위정자의 과오는 신의 뜻을 거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침 구약 성경이 고대 서아시아의 다른 종교적 문헌과 비교하여 두드러지게 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윤리의식이었다. 특히 예언서를 보면 그러하다.

돌보면서 잘 살라

어느 날 예언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살룸을 향해 쓴 소리를 했다. “네가 남보다 백향목을 더 많이 써서, 집짓기를 경쟁한다고 해서, 네가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겠느냐?”(예레미야 22:15) 살룸은 아버지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고서는 “불의로 궁전을 짓고, 불법으로 누각을 쌓으며, 동족을 고용하고도, 품삯을 주지 않는” 탐욕을 부렸다(22:13). 그의 “눈과 마음은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것과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과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만 쏠려”있었다(22:17).

반면 살룸의 아버지 요시야 왕은 올곧은 종교개혁을 수행했던 왕이었으며 예레미야가 존경해 마지않던 선왕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에게 아버지 요시야를 상기시켰다. “네 아버지가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22:15-16)

왕이면 충분히 잘 먹고 마시며 좋은 곳에서 호화롭게 살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런 호사가 일반 서민들의 사정은 무시하고 더 나아가 착취까지 하니 문제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살룸에게 그의 아버지 요시야의 예를 들었다. 아버지가 잘 먹고 잘 살았지만 그것이 흉이 아닌 것은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았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살룸은, 왕이 자기 권력을 가지고 어떻게 서민들을 유린하는지 그 최악의 예만 보여주었다.

구약 성서의 ‘왕의 법’은, 권력자의 전횡을 막고 평생 그 앞에서 율법책을 읽히며 허튼 생각을 못하게 하자는 제시다. 이렇게 왕의 통치를 법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한 법적 시도는 고대 동양에서 알려진 바가 없다 한다.

18세기에 작곡되어 지금까지 수없이 연주되고 있는 헨델의 ‘메시아’에는 유명한 ‘할렐루야’ 합창이 있다. 이 합창의 가사를 통해서도 예수는 언제 어디서나 ‘왕의 왕, 주의 주’로 찬양 받고 있다. 인류의 메시아이며 진정한 왕이라고 칭송 받는 예수가, 자신의 출현은 이렇게 설명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마가복음 10:45)

북유럽 국회의원을 부러워하는 바보가 되지 말고, 우리의 ‘종’을 똑바로 조련할 줄 아는 야무진 국민이 되자.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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