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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 없고 취약했던 '맨몸의 여성' 가부장 권력의 억압과 위선에 맞서다

입력
2018.08.13 04:01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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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옥사나 샤츠코

옥사나 샤츠코는 급진 페미니스트 단체 '페멘(Femen)'의 공동설립자이자 전위의 활동가였고, 종교의 위선과 억압, 성차별을 고발하는 이콘 패러디 화가였다. 그는 2009년 8월 처음 토플리스 시위를 감행해 페멘의 상징적 전술로 정착시켰고, 여성의 몸을 관음과 성적 대상화의 객체가 아닌 성정치의 무기가 되게 했다. femen.org
옥사나 샤츠코는 급진 페미니스트 단체 '페멘(Femen)'의 공동설립자이자 전위의 활동가였고, 종교의 위선과 억압, 성차별을 고발하는 이콘 패러디 화가였다. 그는 2009년 8월 처음 토플리스 시위를 감행해 페멘의 상징적 전술로 정착시켰고, 여성의 몸을 관음과 성적 대상화의 객체가 아닌 성정치의 무기가 되게 했다. femen.org

50년 전인 1968년 9월, ‘뉴욕의 급진여성들(NYRW)’이 국제미인대회가 열리던 애틀랜틱시티 컨벤션센터 광장에서 브래지어를 불태웠다. 그들이 태운 건 강요된 여성성이었다. 만 40년이 흘러 2009년 8월, 우크라이나의 한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국내ㆍ외 정치인들이 모인 독립기념일 행사장에서 상의를 벗고 매춘 중단 시위를 벌였다. 그가 드러낸 건 몸만이 아니라 그 몸을 대상화하는 사회의 인식과 관음의 시선이었다. 그의 가슴은 수치를 피해 가리고,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취약하고 열등한 육체가 아니라 저 관습과 인식, 위선의 시선을 폭로하고 조롱하는 정치적 무기였다. 다시 말해 그가 펼쳐 보인 것은 가슴이 아니라 새로운 거대한 전장(戰場)이었다. 물론 그의 주장이나 행위의 의미보다 그의 맨 살에 더 주목한 이들도 많(았)겠지만, 적어도 그의 뜻은 그러했다. 그가 옥사나 샤츠코(Oksana Shachko)였고, 그의 단체가 ‘페멘(Femen)’이었다. 이후 토플리스 시위는 페멘의 상징이자 전술적 수단이 됐고, 여성의 몸에 대한 새로운 논쟁과 사유의 계기가 됐다.

7월 23일, 31세의 그가 프랑스 파리 남쪽 오드센주 몽루주(Montrouge)의 한 영세민 공공주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 공식 발표는 아직 없지만 외신들은 현장을 목격한 지인들의 진술과 정황을 근거로 그가 자살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페멘은 공식 블로그에 “가장 겁 없고 취약했던(the most fearless and vulnerable) 옥사나 샤츠코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썼고, 이제는 페멘과 멀어진 페멘의 공동설립자이자 샤츠코의 친구 안나 훗솔(Anna Hutsol(Gutsol), 1984~)도 페이스북에 저 말을 그대로 옮겼다.

내겐 ‘vulnerable’이란 저 낱말이 왠지 부조리해 보였다. 정치ㆍ종교ㆍ가부장 권력의 억압과 위선에 맞서 ‘vulnerable’한 몸을 가장 앞장서 드러낼 만큼 맹렬했지만, 투쟁과 시련, 망명과 새로운 시작의 모진 굽이에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응했다는 의미였을까. 나는 저 ‘vulnerable’의 단서 혹은 징후를 찾고자 그에 대한 자료와 기사들을 읽었고, 그러면서 하릴없이, 내가 조금은 안다고 여겨온 몇몇 활동가들을 겹쳐 보곤 했다.

옥사나 샤츠코는 1987년 1월 31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서쪽 250km 남짓 떨어진 작은 도시 흐멜니츠키(Khmelnitsky)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네 살이던 91년 말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우크라이나가 독립했지만, 정치적 혼란 속에 기업 도산과 실업 등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됐다. 정치적 권위의 공백을 소비에트 체제 하에서 억압됐던 종교(러시아정교)가 빠르게 채워갔다. 아버지가 그림을 좋아하던 8살의 샤츠코를 성상화 전문학교(Nikosh School)에 입학시킨 건, 부부가 열성 신앙인이기도 했지만 밥벌이에 유리해 보여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성인 직업학교였던 거기서 샤츠코는 이내 두각을 나타냈고, 96년부터 국내와 미국ㆍ캐나다 등지에서 열린 단체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곤 했다. 그리고 10살이던 97년 흐멜니츠키의 한 교회 프레스코화 작업에 보수를 받고 참여했고, 이듬해 교회 성상화를 주문 받아 그렸다. 그 해 첫 개인전도 열었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는 직장을 잃고 알코올 중독자가 돼갔고, ‘가족’을 갖고 싶어 18살에 결혼했다는 고아 출신 어머니는 남매를 데리고 아버지와 이혼했다. 샤츠코가 익히던 성상화 작업은, 창조적 예술행위라기보다는 정형화한 이미지를 전래의 수단과 기법으로 최대한 모방ㆍ복제하는 기술적 행위에 가까웠다. 그런 그림이 샤츠코에겐 오히려 커다란 위안이었을 것이다.

학교측은 샤츠코의 재능을 탐내 다른 예술학교로 옮기지 못하도록 부모를 설득했고, 어린 샤츠코는 그 작업을 기도처럼 거듭하며 종교에 몰입해갔다. 열두 살이던 99년의 그가 수녀가 돼서 평생 기도하고 그림만 그리며 살겠다고 선언하자, 그토록 독실하던 어머니마저 친지들까지 동원해가며 그를 말리고 설득했다고 한다. 2017년 프랑스 예술잡지 ‘Crash’ 인터뷰에서 샤츠코는 “수녀가 되는 걸 엄청난 비극으로 여기며 울던 어머니의 태도는 무척 놀라웠다”고, “나는 그 결심을 접었지만 종교와 신앙이란 것에 대해, 어른들의 그 모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crash.fr) 그 전서부터 ‘애늙은이 같다(born adult)’는 말을 듣고 자란 그였다. 샤츠코는 이듬해인 2000년 학교를 졸업하고 흐멜리츠키 자유대학에 입학했다. 전공은 미술(도상학)이었지만, 그는 더 이상 성상화를 그리지 않았다.

파리 망명 이후 그림에 전념하던 무렵의 샤츠코. 그는 유년에 익힌 성상화의 기법과 권력에 대한 전복적 상상력을 결합했다. 그에게 그 작업은 새로운 형식의 페미니즘 운동이었다. 로이터 연합뉴스
파리 망명 이후 그림에 전념하던 무렵의 샤츠코. 그는 유년에 익힌 성상화의 기법과 권력에 대한 전복적 상상력을 결합했다. 그에게 그 작업은 새로운 형식의 페미니즘 운동이었다. 로이터 연합뉴스

모두가 앞다퉈 레닌 동상을 허물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 역사철학의 종교비판이 마음에 들어 청년조직 콤소몰(Komsomol)에 가입했고, 무능하고 부패한 당과 학교 당국에 환멸을 느낀 학생들의 독자적 권리 모임으로 탄생한 ‘청년 전망 센터 Center for Youth Perspective’라는 곳에도 가담했다. 그 모임에서 3년 위인 훗솔과 동갑 친구 알렉산드라 셰브첸코(Alexandra Shevchenko, 1988~)를 만났다. 대학 당국자나 시장, 기업가 등을 찾아 다니며 이런저런 문제로 협의할 일이 많았는데, 매번 여학생들은 무시ㆍ배제 당하곤 했다고 한다. 화를 참다 못한 그들이 2006년 여성 독자조직 ‘New Ethics’를 결성했다. 회원은 금세 100여 명으로 불어났다. 크래시 인터뷰에서 샤츠코는 당시 자신들은 페미니즘이 뭔지 몰랐다고, 다만 “아버지나 남자친구에게 겪는 학대, 알코올중독자 남편과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고생하는 어머니들, 소비에트 해체 이후 만연한 국제 매춘과 인신매매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데 의기투합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흐멜니츠키의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의사 비리 탓에 온전한 진료를 못 받은 산모 네 명이 하루 만에 숨지는 일이 일어났다. ‘New Ethics’ 회원들은 전단과 포스터 등을 만들어, 병원과 경찰이 쉬쉬하며 덮으려던 그 사건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보도가 잇따르자 2주 뒤 수도 키예프에서 특별 감찰팀이 파견됐고, 관련자들이 해고되고 처벌받았다. 그 일 직후 훗솔과 샤츠코, 셰브첸코는 근거지를 키예프로 옮겨 그 해 4월 급진 여성인권 단체 ‘페멘’을 창립했다. 그리고 첫 선언 ‘우크라이나는 매음굴이 아니다 Ukraine is not a Brothel’ 를 걸고 퍼포먼스 형식의 시위를 시작했다. 소비에트 해체 이후 서유럽 등 서방 남성들이 생각 없이 일삼던 말 “구소비에트의 남은 경쟁력은 KGB와 인터걸 뿐”이란 말은 농담만은 아니었고, 키예프는 유럽서 가장 값싼 매춘관광지로 악명 높았다. 물론 배후에는 국가권력과 마피아, 그리고 수많은 절박한 여성들이 있었다. ‘인터걸’처럼 옷을 차려 입고 외국 대사관 앞에서 벌이곤 하던 그들의 초기 시위는 하지만 별로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래서 감행한 게 ‘토플리스’ 시위였다. 프랑스 파리로 본부를 옮긴 2013년 이후의 페멘을 이끈 이나 셰브첸코(Inna Shevchenko)는 “우리는 진실을 말했지만, 사회와 국가는 여성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여성을, 특히 알몸을 보고 싶어 했다. ‘그래, 듣지 않겠다면 보여주겠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했다.(nyt, 2013.5.31) 정교회가 찬미하는 정결(chastity)의 상징인 화관을 그들은 저항적 영웅적 자부심의 징표로 삼았다.

페멘의 시위와 메시지는 사진과 함께 전세계로 알려지곤 했다.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회담장, 브뤼셀 유럽의회, 바티칸의 성베드로 광장과 파리 노트르담 성당, 베를린 국제영화제 행사장, 벨라루스의 KGB본부 앞, 미스유니버스 대회장과 ‘유로2012’ 경기장, 푸틴의 대통령 선거 투표소와 정상회담 기자회견장 등등… 그들에게 성역은 없었고, 성 불평등과 매춘, 정치 탄압과 빈부격차, 종교권력의 차별 억압, 여성성기 훼손 관행 등 주장도 다양해졌다. 토플리스 시위 형식에 대한 호응과 비난, 찬성과 반대의 논쟁은 몸- 시선- 인식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페멘 회원들은 벌금도 내고, 구류도 살고, 괴한들에게 납치당해 구타 당하고, 살해 위협도 겪고,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샤츠코도 2011년 12월, 벨라루스 정치범 석방 등을 요구하며 벌인 KGB 본부 시위 직후 괴한들에게 도시 외곽 숲으로 납치 당해 그 혹한에 발가벗겨져 기름을 뒤집어쓴 채 ‘쥐도 새도 모르게…’ 따위의 협박을 당했다. 하지만 이듬해 3월 당시 수상 푸틴의 투표소에 들이닥쳐 그의 전횡을 규탄했고, 2013년 4월 독일 메르켈 총리와 함께 하노버 무역박람회장을 둘러보던 푸틴의 코앞까지 다가가 토플리스 시위를 감행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페멘 주요 활동가들에게 테러 및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를 씌워 기소를 꾀하던 게 2013년 반 푸틴 시위 직후였다. 경찰은 페멘 사무실에서 발견했다는 수류탄과 권총, 표적용 푸틴 사진 등을 물증으로 제시했다. 물론 그것들은 경찰 압수 수색에 앞서 누군가가 ‘심어둔’ 거였다. 샤츠코와 훗솔, 셰브첸코는 연행 직전에 우크라이나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망명을 신청, 파리로 피신했다.

2012년 5월 우크라이나 키예프 페멘 사무실에 나란히 앉은 야나 즈다노바, 알렉산드라 셰브첸코, 이나 셰브첸코, 옥사나 샤츠코(왼쪽부터). 얼마 뒤 이나 셰브첸코는 프랑스로 망명, 파리 지부를 개척했다. 로이터
2012년 5월 우크라이나 키예프 페멘 사무실에 나란히 앉은 야나 즈다노바, 알렉산드라 셰브첸코, 이나 셰브첸코, 옥사나 샤츠코(왼쪽부터). 얼마 뒤 이나 셰브첸코는 프랑스로 망명, 파리 지부를 개척했다. 로이터

2012년 8월 키예프의 대형 나무 십자가 절단사건으로 살해 위협을 받다 프랑스로 먼저 망명한 이나 셰브첸코의 페멘 파리 지부는 우크라이나 본부가 사실상 와해되면서 새로운 본부가 됐다. 파리 지부 리더들은 창립 리더들의 합류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고, 노선과 전술 면에서도 자주 충돌했다고 한다. 샤츠코 일행은 2014년 페멘과 결별했다. 훗솔은 그 해 유로마이단과 우크라이나 혁명 직후 고국으로 되돌아가 홍보회사에 취직했고, 알렉산드라 셰브첸코는 독일로 건너가 독자적인 페미니즘 조직을 개척했다. 샤츠코는 파리 국립예술학교인 보자르 스쿨(Beaux-Arts School)에 등록, 다시 그림을 그렸다. 그가 선택한 그림은 유년의 이콘을 패러디한 반종교화였다. 화관을 쓴 채 담배를 피우는 천사들, 술병 앞에 둘러앉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 부르카를 쓴 성모마리아, 칼리시니코프 자동소총을 든 천사, 여성의 얼굴을 한 성자들…. 2016년 ‘우상파괴(Iconoclast)’란 제목의 개인전을 열 무렵 ‘르 파리지엥’과 한 인터뷰에서 그는 “그림은 새로운 형식의 내 투쟁의 연장”이라고 말했고, ‘크래시’ 인터뷰에서도 “내 작업은 여전히 페미니즘의 일부”라고 말했다.

하지만, 파리의 그는 정치적 망명자였고, 조직에서 외면당한 활동가였고, 가난한 화가였다.그는 “프랑스의 자유를 사랑하지만 망명자의 삶이 결코 녹록하진 않다. 어머니를 만날 수 없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한다. 무척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불어와 영어도 익혀야 했다. 언어 장벽 너머의 그림이, 유년의 경험처럼, 저 힘겨운 것들을 잊게 해준 기도가 돼줬을지는 알 수 없다.

페멘은 세계 17개국에 합법 비합법 조직을 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성극단주의자(Sexremist)를 자처하는 그들의 공식 이념은 성극단주의와 무신론, 그리고 페미니즘이다. 사진은 2012년 3월 파리 시위 장면. wikimedia.org
페멘은 세계 17개국에 합법 비합법 조직을 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성극단주의자(Sexremist)를 자처하는 그들의 공식 이념은 성극단주의와 무신론, 그리고 페미니즘이다. 사진은 2012년 3월 파리 시위 장면. wikimedia.org

어쩌면 가장 힘들었던 건 ‘배신’의 상처를 극복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와 옛 동료들은 ‘이후’의 페멘, 즉 목숨까지 걸던 원년의 페멘이 아닌 ‘나이브하고 리버럴해진’ 프랑스의 페멘을 비판하곤 했다. (메시지를)보여주기보다 (언론에)보여지는 데 치중하고, 세상의 변화보다 페멘의 외형적 성장에 더 신경을 쓴다고도 했다. 크래시 인터뷰에서 샤츠코는 “우리는 (파리에서) 자매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우리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7년을 온전히 바쳐 뭔가를 창조하고자 하다가 조국으로부터 쫓겨난 우리는 파리에서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고 절망했다”고 말했다. 물론 이나 등 그 무렵 페멘의 새 리더들은 사뭇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페멘의 탄생과 활약을 담은 호주 출신 다큐멘터리 감독 키티 그린(Kitty Green)의 2013년 작품 ‘Ukraine is not a Brothel’에 충격적인 주장이 담겼다. 남성 권력으로부터의 급진적 해방을 표방한 페멘이 실제로는 빅토르 스비야츠키(Victor Svyatski)라는 사회주의 남성 활동가가 조직한 단체이고, 페멘의 활동 역시 빅토르의 리더십과 카리스마에 의존해왔다는 폭로였다. 스비야츠키는 “그들(여성 리더들)은 섬약했고, 강해지려는 의지도 없었다. 순종적이었고, 무기력했고, 꼼꼼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내가 가르쳐야 했던 것들이었다”고 말했다.(independent.co.uk) 그의 그런 주장을 멋지게 반박하며 소동을 잠재운 것은 이나 셰브첸코였다. 세브첸코는 2013년 9월 가디언 칼럼에서 빅토르의 조언과 리더십의 기여를 흔쾌히 인정하며 이렇게 썼다. “페멘은 남성이 말하고 여성은 듣고, 남성이 결정하고 여성은 수용하고, 남성이 지배하고 여성은 순응하는 문화 안에서 젊은 여학생들이 설립한 조직이었다. 왜 처음 그가 리더여야 했을까? 그가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인정한 것은, 바로 자신이 가부장권력이자 남성 지배를 긍정하는 성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이다. 그가 스스로 ‘새로운 페미니즘의 아버지’라 선언해서 나는 놀랐다. 왜 우리에게 갑자기 아버지가 생겼지? 어머니는 어디 있지?(…) 나는 가부장권력이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바로 우리 앞에, 페멘의 사무실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싸움은 우리 자신의 사적 삶 속에서 시작돼야 한다는 사실.”(guardian, 2013.9.5)

페멘의 시위는 2013년 이슬람 국가 튀니지의 법무부 앞 토플리스 시위 직후 문화적 차이를 부정하는 우월주의자들의 도발이라는 거센 비판을 진영 내부로부터도 받았고, 성 상품화를 비난하면서 젊고 매력적인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비판도 받았고, 성 스캔들로 말이 많은 경영자가 운영하는 속옷 회사의 후원금까지 받는 건 심하지 않느냐는 비판도 들었다.

그 모든 것들이 샤츠코의 삶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두어 해 전부터 그가 두 차례 자살을 기도했다는 증언이 있고, 그 증언이 사실무근이라는 주장도 있다. 가난 때문이라는 설, 파리라는 도시가 그를 숨지게 했다는 주장, 숨진 채 발견되기 사흘 전 술자리에서 남자친구와 다툰 게 원인일지 모른다는 말도 있다. 진실은 누구도, 숨지기 전 인스타그램에 ‘You Are Fake’ 도안 사진을 올리고, ‘You Are All A Fake(당신들 모두 가짜야)’라는 낙서 같은 메모를 남긴 샤츠코 자신도 말하기 힘들지 모른다. 그리고, 그처럼 용맹하게 앞장서는 사람은 결코 취약(vulnerable)하지 않으리라는 나태한 생각도 그를 그렇게 보내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그의 곁에는 어쩌면 아무도 없었다.

휴머니즘과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호주 독립 매체 ‘Mercatornet’의 저널리스트 캐롤린 모이니한(Carolyn Moynihan)은 샤츠코의 삶과 죽음을 기리는 짧지만 따듯한 기사의 끝에 이렇게 썼다. “옥사나의 비극적 끝은 사회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모든 전사들이 기억해야 할 교훈 하나를 남겼다. 불의에 저항하고 불의를 허무는 데만 당신들의 젊음을 몽땅 바치지는 마라. 먼저, 새로 건설할 그 무엇을 찾고, 함께 할 누군가를 찾아라. 그런 뒤에 나서라.”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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