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쓴 문단의 아이콘

황현산 전 문예위원장 별세
평론가ㆍ불문학자ㆍ번역가 등 활동
사유를 겸손하고 아름답게 풀어낸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유명
문단ㆍ지성계 팬덤 형성하기도
암 투병 끝에 8일 별세한 황현산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황현산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 위원장이 8일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73세.

문학평론가, 불문학자, 번역가, 산문가… 고인을 설명하는 말은 많다. 요약하자면 그는 시대의 지성이자 어른이었다. 지성이되, 따뜻하고 넉넉한 지성이었다. 어른이되, 어른으로 호명되는 것을 부끄러워한 낮은 어른이었다. “나이 든다고 현명해지는 것도 아닌데… 어떤 경우에나 의견이 현명한 것이지, 현명한 의견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2012년 한국일보 인터뷰) ‘정신의 노화’를 거부한 고인은 몸의 쇠함은 피하지 못했다. 2015년 담도암을 진단받은 고인은 암을 이겨낸 듯 보였다. 지난해 12월 문예위 위원장으로 취임했으나, 암이 재발해 올 2월 사직했다. 지난 달부터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해 끝내 영면에 들었다.

고인은 1945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공부 잘하는 가난한 변방 사람’으로 식민지 시대 이후 한국 현대사를 통과했다. 고려대 불어불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프랑스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연결하는 시인인 아폴리네르 연구로 석∙박사를 받았다. 경남대, 강원대 교수를 거쳐 1993년부터 2010년까지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선배 문학평론가 김현의 추모 비평을 발표하며 40대 중반 평론을 시작했다. 고인은 평론가로서 시를 편애했다. “삶이라는 작은 차원에 갇혀 있던 인간이 어떻게 하면 존재 내부의 수많은 차원을 발휘할 수 있는가, 거기서 언어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시 비평을 통해 세밀하게 밝히려 해 왔다.”(2012년 같은 인터뷰)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팔봉비평문학상을 비롯해 대산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등을 받았다. 2007년 한국번역비평학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2010년의 황현산 전 문예위 위원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고인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통찰했고, 사유를 겸손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풀어냈다.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2013)로 널리 이름을 알리며 문단과 지성계의 아이콘이 됐다. 책은 지금까지 6만3,000여부가 팔렸다. 고인은 ‘A는 B다’라고 단언하는 문장을 쓰지 않았다. “사람이 나이 들면 정언적으로 얘기하게 되지 않나. ‘이다’까지 괜찮은데 ‘이리라’까지 간다. 그렇게 정언적으로 말하게 되면 토론이 불가능해진다. 공부를 한다는 건 항상 토론이 가능한 상태여야 한다. 이것이 정말 맞는 것인가, 이 생각을 버리면 안 된다.”(2014년 한국일보 인터뷰)

고인은 가장 많이 읽고 가장 많이 쓰는 학자였다. 투병 중에도 산문집 ‘사소한 부탁’을 냈고, 19세기 후반 프랑스 시인인 로트레아몽 시집 ‘말도로르의 노래’를 번역해 내놓았다. 저서로 ‘잘 표현된 불행’, ‘말과 시간의 깊이’, ‘얼굴 없는 희망’, ‘우물에서 하늘 보기’ 등을 남겼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파스칼 피아의 ‘아뽈리네르’, 드니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집’, 기욤 아폴리네르의 ‘알코올’,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 등을 번역했다.

“나는 세계의 변방, 거기서도 변두리 낙도(고인은 전남 신안군 비금면에서 자랐다) 출신 아닌가. 문학을 통해 보편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절망과 희망, 환멸과 긍지가 뒤엉켰다. 그게 문학적 자산이 되었고, 문학 덕분에 그런 삶을 잘 버텨올 수 있었다. 문학 공부를 한 것이 참 좋았고, 문학에 굉장히 감사하다.”(2014년 같은 인터뷰) 그런 고인의 삶과, 삶을 빼닮은 글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문학이 됐다.

빈소는 고대 안암병원 마련됐다. 발인은 10일 오전 10시에 열리며, 장지는 서울 양재동 서울추모공원이다. 유족은 부인 강혜숙씨와 아들 황일우 미국 마이애미대 교수, 연극배우인 딸 황은후씨다. (02)923-4442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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