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정미반회사건의 앞과 뒤

#1
중인 김석태의 집에 틀어박혀
천주교 교리 공부하는 모임을
절친 이기경이 불쑥 찾아와
다산 등을 타일렀지만 요지부동
#2
며칠 뒤 과거에서 백지 답안 제출
이기경은 다시 다산을 찾아갔지만
다산은 아예 만나주지도 않아
이기경이 다산과 이승훈에게서 빌려보았던 천주교 교리서 '진도자증' 표지. 다산은 자신의 절친이자 학문에도 능했던 이기경을 교인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은거의 꿈

1786년 12월 22일, 정조가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을 다시 서용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정국에 미묘한 변화가 읽혔다. 임금은 탕평의 구상을 내비치며 채제공을 불러들였다. 노론 벽파의 일방통행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이기도 했다. 해가 바뀌어 1787년이 되었다. 1월에는 강계도호부사로 나갔던 장인 홍화보가 서울로 호출되었다.

다산은 1월 26일과 3월 14일의 반제(泮製)에 합격했고, 3월 15일에는 주장을 펴는 전(箋) 부문에서 수석을, 교훈을 담는 잠(箴) 방면에서는 차석을 차지했다. 이때 다산은 거의 1인 2역인 상태였다. 시험 준비하랴, 천주교 모임을 주도하랴 바빴다. 운 좋게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마음이 불안했다. 과거 시험에 대한 회의가 자꾸 짙어졌다.

장인 홍화보가 이즈음 사위 다산에게 매산전(買山錢)을 내렸다. 생활의 근거로 삼을만한 땅을 사서 경제적 자립을 하라는 뜻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다산은 은거에 대한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4월 15일, 큰 형수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초천에 내려간 길에 다산은 형 정약전과 함께 양평의 문암(門巖) 쪽으로 땅을 보러 갔다. 문암은 벽계(檗溪)의 남쪽에 있었다. 그곳이 마음에 들었던지 다산은 산장과 그에 딸린 땅을 매입했다. 산장이래야 세 칸 초가집이었다.

구리개의 소룡동 시절

4월 25일에 아버지 정재원이 사도시(司導寺) 주부(主簿)로 임명되더니, 바로 한성부 서윤(庶尹)으로 옮겼다. 채제공과 장인을 이어 남인들의 정계 진출에 속도가 붙고 있었다. 정재원은 5월에 소룡동(小龍洞)에 새 거처를 마련해 다산 내외를 불렀다. 다산은 ‘소룡동의 집으로 옮기며(就龍洞居)’란 시의 주석에서, “5월에 아버님이 사도시 주부가 되어 다시 서울에 집을 샀는데 나의 뜻이 아니었다”고 썼다. 자신은 문암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아버지 뜻을 따랐다는 의미다.

정재원으로서는 은거를 꿈꾸는 아들을 곁에 붙들어 둠으로써 대과 준비에 계속 매진케 하는 동시에, 여전히 천주교에 깊숙이 관여된 아들을 감시하려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소룡동은 오늘날 종각에서 명동 쪽으로 가는 중간 을지로 입구 어귀에 있던 동네였다. 이곳의 나지막한 고개는 황토라 땅이 질었다. 멀리서 보면 구리빛이 나서 동현(銅峴), 즉 구리개라 불렀다.

이 시절 다산의 모순적 정황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남아 있다. 이기경이 ‘벽위편’에 남긴 증언이다. “정약용이 구리개(銅峴)에 살 때 일이다. 이웃에 한 중인이 있었다.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은 아들을 가르쳐달라고 청했다. 성품이 자못 총기가 있고 지혜로워서 정약용이 이를 몹시 아꼈다. 근처에 산지 한 달 만에 마침내 책 한 권을 가르쳤다. 하지만 아침과 저녁에 밥 먹으러 제 집에 갈 때는 그 책을 가지고 가지 못하게 했다. 그 사람은 대궐 안의 여러 잡무를 맡아보는 액정서(掖庭署)의 아전이었다. 마침내 그 아들에게 틈을 타서 배우는 책을 가져오게 했더니, 바로 사서(邪書) 즉 천주교 책이었다. 그 책이 위로 임금의 귀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정약용이 또한 오래도록 벼슬길에 들지 못하였다.”

당시 다산은 과거 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그 와중에 이웃 중인의 자식에게 천주교 교리서를 가르치고 있었다. 정조는 다산이 천주학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

깊어지는 고민

다산은 1787년 8월 21일 반제에 합격했고, 8월 24일에는 중희당에 입시해 정조를 뵙고 ‘병학통(兵學通)’을 상으로 받았다. 이때 정조가 자신을 무장(武將)으로 키울 뜻을 비추자 다산은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할 결심을 더욱 굳혔다. 다산의 급제가 자꾸 늦어지자 정조는 장인인 홍화보와 나란히 그를 무반으로 키울 궁리까지 했던 모양이다.

당시 다산은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천주교 신앙 문제로 가득 차있었다. 다산은 과거와 교회 일에서 도피하듯, 9월 초순에 가을걷이를 핑계로 문암 산장으로 갔다가 근 한 달 만에 돌아왔다. 은거의 결심을 굳히자 준비가 필요했다. 11월 17일의 황감제(黃柑製) 특별 시험에는 답안조차 제출하지 않았고, 12월의 반제에서는 형편없이 낮은 등수를 받아 한 번 더 임금을 실망시켰다. 마음이 온통 콩밭에 가 있었다.

당시 이승훈은 처남인 다산 형제와 더불어 난동과 반교 두 곳에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 본격적인 천주교 교세 확장과 자체 스터디에 돌입했다. 교단 내부에서 가장 시급하게 생각한 일은 천주교 교리에 정통한 지도자 그룹의 양성이었다. 지도자급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일도 소홀할 수 없었다. 잇달아 이어진 모임은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선연(善緣)이 악연으로

이기경(李基慶ㆍ1756∼1819)은 다산의 절친이자 라이벌이었다. 둘은 시험을 볼 때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된 합격자 명단을 보면 이기경이 수석을 차지하고 다산은 4등을 받았다. 또 다산이 수석을 차지하고 이기경이 후순위로 밀린 성적표도 실물이 남아있다.

이승훈과 다산은 이기경에게 전부터 서학 공부를 열심히 권해왔었다. 1784년 봄에 이기경은 다산에게서 이승훈이 구입해온 서양 서적에 대해 들었다. 호기심이 동한 이기경이 그 책을 보자고 했고, 다산은 이기경에게 ‘천주실의’와 ‘성세추요(盛世蒭蕘)’를 빌려주었다. 둘은 만나기만 하면 이 책에 대해 토론했다. 이기경은 서학서를 베껴 나름대로 정리한 별도의 노트를 가졌을 정도였다. 을사년 추조적발 이후 금령(禁令)이 내리면서 이 일을 멈췄다.

다산의 시험에서 1등 받았다고 표시해둔 과시방.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787년 10월쯤, 이승훈과 다산 등이 천주학을 다시 숭상한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기경은 슬쩍 떠볼 생각으로 이승훈을 만났을 때, 서양 서적을 빌려달라고 했다. 이승훈이 말했다. “믿어야지, 보기만 해서야 무슨 소용인가?” “알아야 믿을게 아닌가. 좀 빌려봄세.” 며칠 뒤 이승훈은 필사한 ‘진도자증(眞道自證)’ 3책을 가지고 와서 하루 밤을 자고 갔다. 이기경과 정미반회사에 얽힌 세세한 이야기는 ‘벽위편’에 실린 이기경의 ‘초토신(草土臣) 이기경상소’에 자세하다.

교리 공부의 현장

열흘쯤 뒤인 11월 초쯤 이승훈과 다산 등이 반촌의 공부 모임에 이기경을 초대했다. 이기경이 수소문해보니 반촌 사는 중인 김석태의 집에 틀어박혀 성균관 식당에는 들르지도 않고 천주학 책만 보고 있다는 풍문이 파다했다. 이기경은 예고 없이 불쑥 김석태의 집을 찾아갔다.

이승훈과 다산, 그리고 진사 강이원(姜履元)이 의관을 정제하고 마주 앉아 있었다. 방에 들어서는 이기경을 보더니 이들은 주섬주섬 책상 위의 책과 물건을 치웠다. 당황했던지 건네는 말에 두서가 없었다.

“자네들 무얼 하고 있던 겐가? 설마 서학 책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 테지?”

다산이 이기경의 말허리를 잘랐다.

“무슨 소린가? 과거 시험 준비를 위해 변려문을 짓고 있었네.”

“지은 글을 보여주게.”

다산이 다시 당황했다.

“이제 막 시작한 참이라, 보여줄 만한 게 없네.”

“그래도 한번 보세.”

마지못해 내놓은 몇 장의 종이쪽은 글이라 할 것도 없는 메모에 가까웠다.

“자네들 왜 이러나? 자네들 솜씨로 이게 말이 되는가? 제발 그만들 하시게. 소문이 밖에 쫙 퍼졌네 그려. 대체 천주학이 무에 그리 좋은 게 있어서, 이렇게까지 하신단 말인가?”

꿀 먹은 벙어리 몇이 그의 말을 들었다. 이기경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며 구슬려도 보고, 윽박지르기도 하다가, 이들이 시치미를 떼고 종내 딴청을 부리자 마침내 화를 벌컥 내고 나갔다.

이승훈, 답안 제출을 거부하다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 일이 있고 며칠 뒤인 11월 17일에 제주에서 진상한 귤을 나눠주며 특별히 시험을 보는 황감제(黃柑製) 과거가 열렸다. 내걸린 제목은 ‘한나라 분유사(枌楡社)’에 관한 것이었다. 한고조(漢髙祖)가 분유(枌楡), 즉 느릅나무를 한나라 사직단의 신주목(神主木)으로 정하고 이곳에 봄 2월과 납월에 양과 돼지로 제사 지내게 한 고사를 가지고, 국가의 제사와 관련해서 써야 하는 글이었다.

이승훈은 문제를 받아 들더니 굳은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물고 팔짱을 낀 채 답안지에 한 구절도 쓸 생각이 없었다. 이기경이 어째 그러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 자못 놀라웠다.

“천주학에서는 천주 외에 다른 신에게는 제사를 지내지 않네.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을 뿐 아니라, 이 같은 글을 짓는 것조차 큰 죄가 된다네.”

이승훈은 끝내 한 글자도 안 쓴 채 과거장을 나왔다. 과거 시험 때마다 자신이 받은 등수와 채점관의 이름까지 꼼꼼하게 기록해둔 정약용의 연보에도 이날 황감제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다. 다산 또한 이날 이승훈과 마찬가지로 백지 답안지를 제출했던 것이다.

이승훈의 태도에 경악한 이기경은 그날 밤 이승훈과 함께 자면서 그러지 말라고 나무랐다. 이승훈은 생각을 바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다산이라도 타일러 보려고 이후 이기경은 두 차례나 따로 더 다산의 집을 찾아갔다. 다산은 그를 따돌리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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