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한국일보에 연재중인 ‘100년에서 100년으로’ 제23회분(2018년 7월30일자)은 이광수의 생애와 저술을 이렇게 평가한다. “이광수가 우리 현대 지성사에 남긴 유산은 세 가지다. 근대 소설의 선구자, 민족주의의 개척자, 친일파로서의 활동이 그것이다.” 춘원의 친일 전향 기점을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1922년으로 잡는 것이 보통이지만, 민족개조와 실력양성을 통한 준비론은 그의 첫 장편소설이자 한국 최초의 근대장편소설이라는 ‘무정’(1918)에서부터 돌올하게 드러난다. 도산 안창호의 제자인 춘원은 이 작품을 이렇게 끝맺었다. “큰 학자, 큰 교육가, 큰 실업가, 큰 예술가, 큰 종교가가 나와야 할 터인데, 더욱더욱 나야 할 터인데.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이 아니다.” 애초부터 그는 싸우기보다 사람을 키워야 한다는 쪽이었다.

‘무정’은 춘원이 출발부터 준비론자였다고 말해주지만, 이런 사실보다 더 크게 의미를 두어야 할 사항이 따로 있다. 바로 이 소설이 일본식 악덕인 ‘사소설’로부터 한국 근대문학을 방어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무정’이 성취한 문학적 업적(언문일치, 반봉건ㆍ계몽 의식, 사실주의)에 가려 그 중요성이 부각되지 않고 있다.

사소설은 세계문학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본만의 특유한 장르다. 이 장르의 정치ㆍ역사적 함의는 국가와 작가 사이의 신사협정으로 설명된다. 즉 작가가 공적 화제에 입을 다무는 이상 국가도 작가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상호간의 암묵적 합의가 사소설을 낳았다. 작가가 ‘나’를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내세워 자신의 심경과 사생활을 파헤치는 이 장르의 묘미와 난관은, 작품이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작가 자신의 삶이 그만큼 극적이 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사소설 작가에게는 자멸파(自滅派)니 자해파(自害派)니 하는 딱지가 붙었다. 다야마 가타이는 여제자에게 애욕을 품었던 경험을 고스란히 옮긴 ‘이불’(1907)을 썼고, 그와 쌍벽인 시마자키 도손은 여조카와 육체관계를 맺고서 ‘신생’(1919)을 썼다.

이광수 글쓰기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단연 ‘자서전적 글쓰기’다. ‘그의 자서전’(1936), ‘나’(1947), ‘나의 고백’(1948) 같은 자서전이 그랬거니와, 자서전적 글쓰기와 거리가 멀다고 착각하기 쉬운 소설에서마저 자서전적 일화를 활용했다. 어느 평자가 ‘무정’을 가리켜 “그의 25세까지의 자서전”이라고 했던 말은 어느덧 상식이 되었다. 춘원의 글쓰기가 이러했던 것은 일본이라는 창구를 통해 문학을 배웠기 때문이다.

사소설의 독소가 그만큼 깊었으나 ‘무정’을 사소설이라는 평자는 아무도 없다. 이광수는 사소설을 쓰려야 쓸 수가 없었다. 일본 작가들과 달리 춘원에게는 협약을 맺을 수 있는 국가가 없었다. 일본 작가는 욱일(旭日)하는 제국주의 국가 안에서 ‘동조의 침묵’이나 ‘거부의 침묵’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춘원이 놓인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식민지 지식인이었던 그는 미래에 올 국가의 바탕이 될 민족부터 개량해야 했다. 그가 사소설에 순순히 투항하여 연애와 개인 잡사 쓰기에 열중했더라면, 민족개조론과 같은 미끄러운 비탈길을 타고 민족의 배신자가 될 리도 만무했다. 그가 사소설을 쓰지 않았기에 한국 문학사는 일본 문학사에 편입되는 것을 면했다. ‘무정’이 보유한 ‘최초’라는 역사적 의미는 그만큼 무겁다.

언젠가 이 지면에 ‘이광수 최남선은 안 되는 이유’(2016년 8월19일자)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은 이광수 문학상 제정을 반대하는 것처럼 읽히지만, 내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 육당에 대하여는 깊이 고민해 본 바 없지만, 춘원의 경우에는 친일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를 문학적으로 기념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도 춘원문학상을 만들겠다고 나선 한국문인협회는 반대 여론을 설복시킬 문학 내적 근거를 마련해 두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한국문협은 역풍을 맞고 며칠 만에 문학상 제정을 취소했다. 1만3,000명의 문인이 모였다는 한국문협은 동네 반상회보다 못했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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