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NS 올라온 게시물만 16만건
주부∙직장인… 평범한 사람들
음악∙음식∙에피소드 등
소소한 일상을 그림으로 남겨
우울증 투병기 공유해 힘 얻기도
#2
수천번 터치 거듭하며 완성
그림이 사진보다 기억 더 생생
태블릿 등 디지털 도구도 이용
무엇이든 손으로 만든 것의 숭고함을 새삼 느끼고 있다는 노미숙씨의 그림일기. 그림의 소재를 눈 여겨 보는 습관이 그의 일상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노미숙씨 제공

“친애하는 나의 일기장(Dear My Diary).”

우리가 일기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는 건 안네(2차 세계대전 중 ‘안네의 일기’를 쓴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에게 감복한 덕이기도 하지만, 진정 일기야말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받아 주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일기가 모든 선생님의 단골 숙제로 등극한 것도 ‘쓸 게 없다’며 머리를 쥐어짤 아이들을 괴롭히기 위해서라기보단, 공책에 늘어놓는 넋두리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어른이 돼 보니 절감했기 때문일 테다. 물론 이 밀린 숙제에 지친 나머지 적잖은 아이가 ‘시키지 않으면 절대 일기 같은 것은 쓰지 않는’ 어른으로 자란다는 게 작은 비극일 뿐.

방학 숙제를 내준 선생님도 없는데, 다시 그림 일기장을 꺼내 든 어른들이 있다. 어른이란 본디 낯간지러워서, 정말 할 말은 많지만 입이 아파서, 그럴 기운조차 없어서 일기 같은 것은 쓸 수 없는 존재라는 통념을 깨고 다시 가만히 펜을 든다. 거기다 그림까지 그린다.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그림일기’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어느덧 16만개에 이른다. 창작 크라우드펀딩 ‘텀블벅’에서도 지난해 처음 그림일기에 관한 프로젝트가 등장한 이후 최근까지 16개가 등록됐다.

화가도, 일러스트레이터도, 웹툰 작가도 아닌 평범한 이들이다. 내 일기니까, 그림 실력에 대한 평가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온갖 감정에 사무치는 밤, 낙서하듯이 때론 작품에 몰두하듯 어른들이 쓱쓱 토해 내는 그림은 어떤 빛깔일까. 그려 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이 행복한, 불안한, 우울한, 치열한 시간을 통과하는 이들의 일기장을 슬며시 엿봤다.

그림일기를 그리기로 결심한 첫 날의 일기. 작은 작품을 완성한 뿌듯함이 묻어난다. 노미숙씨 제공
관찰이 곧 행복이더라

지난 7월 그림일기를 다시 시작한 노미숙(29)씨가 일기장을 꺼내 든 것은 5년간 몸담은 직장에서 퇴사(6월)하면서다. 더 늦기 전에 여행하며, 배우고 개인적 과제들을 해 나가고 싶어 스스로 4개월의 휴식기를 선물한 것. 치열하게 사느라 미뤄 뒀던 소중한 일상을 되살린 지 한 달쯤 됐을까. 문득 하루를 그림으로 기록해 보기로 결심했다. 불현듯 “규칙적인 일상이 주는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일과는 생각지 않았던 뿌듯함을 선사했다. 드로잉북에 앞이 뾰족한 사인펜으로 쓱쓱 그림을 그려 나가다 보면, 별것 아닌 그림인데도 작품이 된 것 같아 늘 기쁨이 밀려들었다. “간단한 그림이더라도 다 그리고 나면, ‘완성했다’라는 기분이 들어요. 비록 ‘똥손’이지만 꾸준히 그리면서 반복되는 성취감도 들었고요. 지금은 몇 장씩 쌓인 일기들을 보고 있으면 그저 뿌듯해요.”

그리는 습관은 무엇보다 자신을 둘러싼 일상을 더욱 느리게, 보다 소중히 들여다보게 했다. 늘 그림의 소재를 두루 떠올리는 덕이다.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일상 속 음식, 음악, 장소들을 관찰하려고 노력하게 되더라고요. 더불어 제 감정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보려는 연습도 하게 됐고요. 하루 5분이 주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인 거죠.”

여행 중 마주친 풍경, 마주친 사람들의 말 한마디를 곰곰이 곱씹으며 그림을 그려 나가는 시간은 여행자 부부의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일과가 돼 가고 있다. 김예슬씨 제공

사진이 아닌 그림이라 비로소 만끽하는 기쁨이 따로 있다고 한다. 세계를 여행 중인 김예슬(30)씨와 강수일(32)씨 부부가 그림일기를 그리는 이유도 비슷하다. 7년 차 승무원, 3년 차 반도체 회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던 이들이 돌연 여행자가 된 것은 ‘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자성 때문. 기왕 떠나는 여행, 마주하는 일상을 그림으로 그려 보자는 건 아내의 아이디어였다. 학창시절부터 그리기를 좋아했고, 공황장애를 겪을 정도로 아프고 외로웠던 승무원 시절도 그림으로 견딘 터라, 인생의 탐색기를 거칠 부부에게 그림일기가 큰 위로가 될 거라는 생각에서다. 이런 제안을 들은 강씨는 여행 전 한 달간 미술학원까지 다니며 “맹연습을 했다”고 한다.

아내의 예상은 적중했다. 연필, 펜, 물감, 색연필을 모두 다채롭게 활용하는 아내에게도, 세심한 스케치만 해 나가는 남편에게도 마주하는 일상은 모두 예술이 됐고, 들이쉬는 공기는 더 진하게 마음에 남았다.

“가끔 번거롭게 그리지 말고 사진을 찍으라는 분도 있지만, 사진이 아닌 그림이기 때문에 더욱 보람을 느끼고 애착이 생겨요. 사물 하나, 풍경 하나에 집중하니까요. 정말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한 번의 셔터가 아니라 수천 번의 터치로 그 순간을 기록한 만큼 나중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림을 보아도 그 배경과 공간을 채웠던 공기, 빛, 내 느낌, 생각을 더 생생하고 진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예슬씨)

마음 깊이 담아두고 싶은 풍경, 차마 전하지 못한 말과 기도 등이 일기 한 폭에 오롯이 담겼다. 김예슬씨 제공

남편 수일씨도 동의한다. “사실 과거 일 중에 우리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얼마 없잖아요. 매일 그려 나가다 보니 하기 싫은 일을 마무리 지어야만 하는 회사에서와 달리 작지만 정말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완성하고 끝냈다는 느낌이 들어 좋고, 나도 모르게 잊어버릴 법한 과거를 소중히 저장하는 기분이에요.”

비로소 표현된 감정의 응어리

그림일기가 낮의 풍경을 가만히 담는 데만 쓸모 있는 게 아니라, 감정을 추슬러야 할 밤에 더 유용하다는 이들도 있다. 바빠서, 체면 때문에, 나보다 남을 더 챙기느라 정리하지 못했던 감정을, 육하원칙으로 풀어내지 못했던 응어리들을 그림으로 펴 나갈 수 있다는 것.

홀로 캐주얼 와인바를 운영하기 시작한 권재성(29)씨에게 그림일기는 미처 전하지 못한 말, 돌아보지 못한 마음을 정리하는 수단이다. “혼자 바쁘게 주방일, 서빙, 설거지 등 모든 일을 해 나가다 보니 손님과 소통을 전혀 못 하게 되더라고요. 한 분 한 분 다 얘기해 보고 싶었는데 무리라서요. 그래서 그날 있었던 일을 무작위로 에피소드처럼 그려 보기도 하고, 일과를 정리하면서 스스로 손님한테 어떻게 대했는지 되돌아보기 시작했어요.”

1인 영업장을 다시 찾아와 준 손님에 대한 고마움, 그를 위해 그릇이 넘치게 음식을 담아낸 뿌듯함 등이 표현된 삐뚤삐뚤 일기장. "양 많이"를 외친 손님을 떠올리며 하얀 양을 많이 그렸다. 권재성씨 제공

어렸을 때 쓰던 그림 일기장의 느낌이 좋아 붓이나 드로잉북 대신 포토샵을 이용해서 마우스로 ‘삐뚤빼뚤’한 글씨와 그림을 그려 나간다. 소통하지 못한 답답함과 아쉬움을 담아낸 만큼 일기는 남몰래 간직하는 대신 인스타그램에 올려 둔다. “양 많이 달라”던 손님에게 접시 넘치게 음식을 내줬던 일과를 떠올리며 양을 여러 마리 그리는 등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듯한 주인장의 일기에 SNS 친구들이나 손님들의 즐거운 반응이 돌아온 것은 부수적 효과다.

“이젠 (일기를)안 쓰는 날은 일과의 끝맺음이 별로라는 생각도 들어요. 확실히 일기를 그리며 ‘내가 이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했구나, 이런 느낌을 받았구나’라는 생각을 한 번 더 정리하는 게 좋아서요.”

그림일기를 통해 SNS 계정에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어렵사리 꺼내 놓았다. 이 때 돌아온 "용기 있다"는 응원에 힘입어 연재를 이어 나가고 있다. 남연오씨 제공

직장인이자 평범한 딸, 그리고 아내인 남연오(30)씨에게 그림일기는 힘겨운 우울증과 싸움에서 용기를 주는 도구다. 그는 “병과 치열하게 싸웠던 이 시기를 나중에 되돌아보고 싶었고, 매일매일의 표정과 감정을 기억하고 싶어 그림일기를 시작했고 인스타그램에 연재도 하게 됐다”며 “보는 많은 분이 공감하고, 본인들의 힘든 이야기를 나눠 주셔서 큰 보람을 느끼고 위로와 감동을 받는 중”이라고 했다.

“단순한 일상보다는, 우울증과 관련된 이야기, 인간관계, 그리고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그리려고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그림을 꾸준히 그리는 것을 통해 매일 한 가지씩의 깨달음을 저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그림일기를 다시 봤을 때, 그런 시련을 극복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제가 기특하게 느껴질 때도 있거든요.”

수정할 수 없는 만년필로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을 신중하게 한 컷씩 담아내자는 목표를 실현해 왔다는 그는 그림일기 책 출간과 텀블벅 펀딩을 준비하면서는 태블릿PC로 도구를 변경한 상태다. 우울증에 대해 꺼내 놓고 이야기하고 독자와 소통하는 게 회복을 앞당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꼭 병과 싸우고 있지 않더라도, 하루하루를 흘려보내고 있다는 허무함이 드는 분들은 그림일기를 시작해 봤으면 좋겠어요. 글로 쓰는 일기가 힘들다고 느껴질 때조차 그림일기는 그날의 내 표정을 담으면 되니 부담이 적고, 나중에도 기억하고 싶은 그날그날의 추억을 생생하게 담아 주거든요.”

즐겁고 뿌듯했으면 그것으로 족하지만, 남씨의 말처럼 자신의 감정들이 노트 한 권에 눈에 쉽게 들어오는 이미지로 차곡차곡 담긴다는 점도 예찬론자들이 꼽는 그림일기의 장점이다. 뚜벅뚜벅 일기장에 직접 그리는 일상의 자국, 감정의 흔적을 돌아보는 기쁨은 그려 본 자만의 특권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데 서툰 동료 어른들에게 이들이 그림일기를 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려 놓고 보면 즐거움과 보람을 많이 느껴요. 일기 한 편이 완성되면 마치 화가가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킨 것 같고 저만의 작품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어느덧 한 권의 일기장에 일기가 빼곡히 차면 그 일기장은 저만의 작은 전시회이자 작품집이 되는 거죠.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일기를 그리는 과정이 나를 알아 가는 힐링 여행이 됩니다.” (김예슬씨)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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