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일본 곳곳에 자리 잡은 토끼들

일본 여성들은 유튜브에 ‘토끼 화장’ 과정을 담은 영상을 올린다. ‘토끼 메이크업’은 토끼처럼 귀여운 느낌으로 화장하는 것을 말하는데, 2015년 유행하기 시작해 지금은 보편적인 화장법이 됐다. 유튜브 캡처

얼마 전 일본 오사카로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작은 토끼 도자기 인형을 선물로 줬다. 그 친구는 “일본에는 굳이 애써 찾지 않아도 토끼를 소재로 만들어진 물건이 많았다”며 “일본 사람들은 왜 그렇게 토끼를 좋아하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포털사이트 야후 재팬에서 토끼를 검색하면 약 9,400만 개가 넘는 결과물이 나온다. 토끼를 키우는 방법, 토끼 화장법 등 토끼와 관련된 다양한 글과 영상, 사진을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토끼를 키우는 사람들도 많다. 2015년 일본 토끼 보호 단체 ‘월드래빗팬클럽’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토끼를 입양한 일본인은 16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토끼가 일본에서 애완동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부터다. 좁은 방에서도 키울 수 있다는 점이 인기 요인으로 분석된다. 일본의 토끼 관련 사이트 ‘우사기 러브넷’에서 활동하는 한 토끼 반려인은 “일본에서는 개나 고양이 등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은데, 집값 상승으로 방 크기가 점점 작아지면서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는 토끼가 인기를 끌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일본 토끼 전문 매장에서 구입한 사료와 영양제. 이순지 기자

토끼가 애완동물로 인기가 높아지면서, 토끼 관련 산업도 일본에서 발전하고 있다. 반려 동물 관련 통계를 제공하는 ‘퍼드지’(Pedge)는 지난 2월 소형 애완 동물인 토끼의 인기가 상승하면서 사료 등 관련 산업도 급성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에는 ‘우사기노 싯뽀’ 등 토끼만을 위한 전문 매장도 있고, 토끼를 키우기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어디서나 쉽게 살 수 있다. 국내 토끼 반려인들 중에선 토끼 제품들을 구입하기 위해 일본에 원정가는 경우도 적잖다.

또 일본에서는 반려동물로 키우지 않더라도, 토끼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토끼 그림, 토끼 관련 물건들이 많은 이유다. 일본 네티즌들은 일본인의 토끼 사랑은 ‘설화’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랑과 희생의 힘으로! 널 지켜 주겠어!” 일본 설화 속 ‘달 토끼’
일본 교토 청수사에서 촬영한 토끼 관련 상품. 이순지 기자

일본 설화 ‘옛날이야기 집’에서는 토끼가 ‘헌신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설화 내용은 이렇다.

“옛날 옛적에 토끼, 여우, 원숭이 3마리가 불교 수행을 위해 힘쓰고 있었다. 한 노인이 이 동물들을 돌봤는데, 노인을 위해 원숭이는 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구해왔고 여우는 강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아왔다. 하지만 토끼는 매번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토끼는 ‘자신을 구워 먹으라’며 불속에 뛰어들었는데, 그때 노인이 불교의 수호신 ‘제석천’으로 변해 토끼를 달로 옮겼다. 토끼의 희생정신을 모든 생물에게 보여주려던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달을 볼 때마다 토끼를 생각하게 됐다.”

토끼는 일본의 옛날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인데, 주로 긍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졌다. 남을 위해 희생하거나, 귀여운 외모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로 일본인들에게 인식됐다. 또 일본에서 토끼는 산신령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때문에 일본 신사에 토끼 상징물이 놓여있는 곳이 많다. ‘사랑의 전령체’라고 불리는 일본 교토 청수사의 토끼 상징물은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하다.

일본 사람들은 새해를 맞을 때나 이루고 싶은 소망이 생겼을 때, 신사에서 토끼 상징물을 바라보며 정성스럽게 소원을 빈다. 새끼를 많이 낳는 토끼의 습성 때문에 이 상징물에 소원을 빌면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널리 퍼져있다. 때문에 신사에선 토끼가 그려진 부적들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설화와 신사의 토끼 상징물 등을 통해 형성된 일본 사람들의 토끼 사랑은 자연스럽게 토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토끼 사랑이 만들어낸 ‘토끼 메이크업’, ‘토끼 보험’, ‘토끼 카페’
일본에는 토끼가 모델인 문구류가 많다. 토끼 랄라가 토끼가 그려진 노트를 입에 물고 있다. 이순지 기자

지난 2015년부터는 ‘토끼 메이크업’이 일본 여성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토끼 메이크업’에는 토끼의 귀여운 외모를 닮고 싶은 일본 여성들의 마음이 담겼다.

주로 귀여움을 드러낼 수 있는 분홍색 화장품을 사용한다. 눈은 아이라인 제품과 마스카라를 사용해 크고 동그랗게 표현한다. 최대한 귀엽고 사랑스럽게 얼굴을 꾸미는 것이 이 화장법의 특징이다. 일본 여성들은 토끼 메이크업을 마친 후에는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는 토끼 포즈도 잊지 않는다. ‘토끼 메이크업’은 이제 일본 여성들 사이에서 보편적인 메이크업이 됐다.

일본에는 ‘토끼 보험’도 있다. 국내에는 토끼만을 위한 애완동물 보험이 없지만 일본에서는 애니컴 등 보험회사들이 토끼 치료비, 병원 통원비 등을 보장해주는 보험 상품들을 내놓고 있다. 한 달 보험료는 보험 내용에 따라 1,910~2,270엔으로 다양하다.

일본 도쿄 토끼 카페에서 만난 토끼들이 케일을 먹고 있다. 이순지 기자
일본 토끼 전문 분양 가게의 토끼들. 이순지 기자

‘토끼 카페’도 최근 일본을 대표하는 카페 문화로 자리 잡았다. 로켓 뉴스 등 일본 매체들에 따르면 애완동물로 토끼를 키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나 토끼를 키울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토끼 카페를 주로 찾는다. 토끼에게 간식을 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인데, 인기가 높아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방문이 어렵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토끼와 관련된 슬픈 역사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토끼섬’으로 알려진 일본 히로시마현의 작은 섬 ‘오쿠노시마’ 이야기다.

일본인 마음을 아프게 한 ‘토끼섬’의 비밀

오쿠노시마는 지금은 ‘토끼섬’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한 때 일본 지도에서 삭제됐던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이 곳에서 수천 톤의 독가스를 생산했다. 이때 만들어진 가스로 사망한 민간인만 약 8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섬에서 토끼는 독가스 실험에 희생됐다. 1929년 일본군이 화학 무기 제조를 시작했을 때 토끼를 이 섬에 데려왔다고 한다. 독성 가스의 유효성을 검사하는 토끼들이 사용됐다. 앨리스 크라우드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교수는 미국 반려동물 전문매체 ‘더 도도’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전쟁이 끝나면 토끼를 멸종시킬 계획이었지만, 토끼 약 8마리가 살아남아 지금의 토끼 섬이 됐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토끼섬’으로 유명해지면서 관광객들의 부주의로 죽는 토끼들도 많다고 한다. 일부 관광객들이 토끼 몸에 해로운 먹이를 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 토끼 보호단체들은 이 섬의 토끼 보호 운동도 펼치고 있다.

일본에서 구입한 토끼 관련 상품들. 이순지 기자

이순지 기자 seria112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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