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삐딱한 아굴의 지혜

#너무 가난하여 죄를 범하면
하나님 이름 욕되게 할까봐
너무 부유해서 배부르면
아예 하나님을 잊어 버릴까봐...
요셉 퍼디난드 케플러 작 ‘스올로 가는 급행선(1888). 사람이 죽어서 기차를 타고 스올로 가고 있는 광경을 그렸다. 스올은 지옥과는 다른 개념이지만, 종종 지옥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주님께 두 가지 간청을 드리니,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여 주시고,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잠언 30:7-8) 참 난처하면서도 깊은 성찰을 일으키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가난은 힘들고 부끄러워 싫지만, 부자가 되는 것에는 조금의 염려도 없다. 궁핍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은 자주 보았지만, 너무 부유할까 걱정된다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오히려 하늘에서 몇십억 원 떨어뜨려 주시기만 하면, 선한 일을 위해 잘 쓰겠다고 자신만만해한다. 나도 그랬다.

기도는 이렇게 이어진다. “제가 가난해서, 도둑질을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타당한 말이다. 이런 일이 교인에게 벌어지면, 결국 하나님 망신이다. 그런데 기도는 이렇게도 말한다. “제가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하면서 ‘주가 누구냐’고 말하지 않게 하시고.”(30:9) 성경이 말하는 사람이란 그렇단다. 너무 가난하여 신앙 양심을 저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너무 배가 부르면 양심 정도가 아니라 신을 버린다.

흥미롭게도 이 기도는 두 가지 가능성에 똑같이 무게를 두고 있다. 사람은 물질 앞에 신앙도 버릴 수도 있는 존재이지만, 너무 부자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드물다. 물욕 앞에는 장사가 없다. 아니, 목사도 없다.

이 기도문은 성경의 ‘잠언’이라는 책에 담겨 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오래도록 회람되어 오던 격언과 속담을 잘 정리하여 모은 잠언은, 전통적으로 솔로몬 왕의 편저로 알려져 있다. 정확히는 그의 아래 있던 학자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대왕 아래 있던 집현전 학자들 같은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 기도문이 담긴 잠언의 30번째 장은, 성경에 잘 알려지지 않은 아굴이라는 사람의 저작이라고 명시되어 있다.(30:1) 인간 내면의 허점을 예리하게 꼬집어 낸 이 기도문은 아굴이 쓴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삐딱하다. 잠언은 당시 꽤 교양 있고 학식 수준이 높은 자들의 세계관이 배어 있는 책이다. 그런데 아굴은 그런 자들을 느끼하게 여겼다. 그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문을 연다. “참으로 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우둔한 짐승이며, 나에게는 사람의 총명이 없다. 나는 지혜를 배우지도 못하였고,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아는 지식도 깨우치지 못하였다.”(30:2)

고매한 철학과 신학을 논하는 집현전(?) 학자들 앞에서 내뱉는 그의 첫마디가 배배 꼬여 있다. 자신은 그들만큼 유식하지도 않고 가방끈도 짧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질문한다. 너희 중에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사람이 누구며, 바람을 자기 손에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 물을 그 옷자락으로 싸고 있는 사람이 누구며 땅의 모든 경계선을 그은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의 이름은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은 무엇인지, 정말 네가 아느냐?”(30:4) 하늘에 직접 가 보지도 못했으면서, 뭘 조물주에 대하여 그리 잘 안다고 ‘탁상공론’을 하시냐며, 그 느끼한 상류 지식인들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래도 성경에 있는 글이니, 유대교-기독교에서는 당당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아굴의 글 중에는, 마음을 또 난처하게 만드는 구절들이 있다. “거머리에게는 ‘달라, 달라’ 하며 보채는 딸이 둘이 있다. 전혀 배부른 줄 모르는 것이 셋, 만족할 줄 모르는 것 넷이 있으니”(30:15) 아무리 줘도 족한 줄 모르는 것들이 있단다. 먼저 거머리를 예로 들었다. 거머리는 사람이나 동물 몸에 붙어 피를 빨기 시작하면 몸뚱이가 터지도록 불어도 족한 줄 모르고 한없이 빨아 댄다. 그런데 이런 욕심쟁이들이 더 있다. “곧 스올과 아기 못 낳는 태와 물로 갈증을 없앨 수 없는 땅과 만족하다고 말할 줄 모르는 불이다.”(30:16)

‘스올(sheol)’은 구약성서에서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을 일컫는 말이다. 무저갱(無底坑) 같은 곳이어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죽어 던져져도 영원히 차지 않는 곳이다. 스올에게 만족이란 없다. ‘아기 못 낳는 태’는 당시 원시시대 남자들에게 참 갑갑한 것이었다. 왜 아내가 임신을 못하는지 과학적으로 알 길이 없던 때, 밤마다 그렇게 부지런히 아내의 몸 안으로 씨앗을 뿌렸건만 열매가 맺히질 않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해야’ 만족하겠냐며 발칙한 독설을 했다. 지금 같으면 여성을 폄하하는 글로 지탄받을 말이다.

#무명의 아굴이 지은 잠언 30장은
만족 모르고 부모 괴롭히는
욕심쟁이 인간을 거머리에 비유
하나님 자식인 우리 모습일 수도...

‘물로 갈증을 없앨 수 없는 땅’은 가뭄 때에 쩍 갈라진 논바닥을 상상하시면 된다. 물을 한 바가지 뿌려 봤자 순식간에 바닥으로 스며들 뿐, 전혀 차오르지 않는다. 갈증 난 땅도 만족이란 모른다. ‘만족하다고 말할 줄 모르는 불’도 더 달라고 아우성이다. 주변에 탈 것만 있으면 영원히 꺼지질 않는다. 뭐든 무섭게 집어삼키는 화마도 만족을 모른다.

만족을 모르는 것들로, 아굴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그 시작은 거머리와 자식이었다. 그리고 이어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아버지를 조롱하며 어머니를 멸시하여, 순종하지 않는 사람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새끼 독수리에게 먹힐 것이다.”(30:17) 한마디로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식 놈들은 까마귀에게 쪼여도 싸다는 말이다.

더 달라고 보채는 거머리의 자식, 아무리 줘도 만족을 모르는 것들, 그리고 불효자. 문단의 흐름으로 보자면 아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줘도 만족할 줄 모르고 보채기만 하는 존재가, 바로 어느 부모에게나 있는 그들의 자식이다. 그랬던 자식들이 커서 불효를 하다니 참담하다는 것이다. 아굴은 그 특유의 삐딱한 독설로, 자식이란 부모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고약하게 꼬집고 있다.

자식은 정말 거머리다. 실제로 엄마의 몸 안에서 열 달을 지내면서, 모체의 피와 몸을 흡입하며 자라난다. 다이어트가 일생 과업이었던 여자들도, 일단 아기만 들어서면 몸매를 저버린다. 자기 몸을 먹고 자라야 할 아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도 성능이 너무 좋은 거머리 둘이 있다. 가뭄에 쩍 갈라진 논바닥은 다름 아닌 내 통장이다. 우리 집 두 거머리가 단단히 빨판을 꽂아 놓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월급날은 전산상의 신기루를 체험하는 희한한 날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도 날 낳고 길러주신 부모에게는 거머리였다. 거머리 중에서도 특급이었다. 막무가내로 공부만 하고 맘대로 결혼하여 유학까지 갔으니 말이다. 심지어 결혼하고 아내의 피도 빨아먹고 살았으니, 나는 거의 흡혈귀였다. 세 마리의 거머리에게 늘 당해서 그런지, 아내는 유독 하얗고 고단백 음식을 좋아한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엄마의 배 속에서 무위도식하다가 태어나지 않은 자 없다. 척박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불평하는 이도, 사실 그 인생을 모태의 전적인 보호와 헌신 가운데 따뜻하게 시작했다. 모태의 그 무궁한 평온함은 우리 기억의 어딘가에 분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고맙게도 생명체는 이 흔적을 지니고 있기에, 배우지 않아도 자기 자식은 그렇게나 사랑할 줄 아는가 보다.

완벽했던 엄마의 태에서 나와 바깥세상의 시린 공기가 피부에 닿기 시작하면, 아기는 마치 만족이란 1도 모르는 아이처럼 생떼쟁이가 된다. 이렇게 더운 여름날에도, 잠 못 들어 생떼 부리는 아기를 엄마는 한 팔로 안고 한 팔로 연신 부채질해 주며 어른다. 어디 이뿐일까.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데도 커서 부모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망나니는 아굴의 말대로 혼쭐이 나도 싸다. 물론 인생에 따라 예외의 경우도 있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다소 막되어 보이는 말들이 솔로몬의 것이라고 오해할까 봐 염려가 됐나 보다. 잠언 30장은 아굴의 글이라고 못을 박고 시작한다. 그의 독설이 듣는 이를 당혹하게 하지만, 마음에 남기는 여운은 만만치 않다. 때로는 이렇게 변칙적인 각도에서 찔러야 효과가 있나 보다. 사람에게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돈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그 부모의 거머리였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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