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성균관 어귀의 교회 본부

#1
천주교 재건에 힘 보태느라
공부 전념 못해 번번이 낙방
10인의 사제에 임명된 걸 계기로
서학의 바다로 다시 뛰어들어
#2
천주교 활동은 점차 대담해져
회현동과 성균관 어귀 2곳에
서울지역 집회공간 만들어
가성직 제도 하의 미사 장면. 초기 조선 천주교는 자생적이어서 사제없이 미사를 꾸려야 했다. 탁희성 그림, 김옥희 수녀 제공
다시 가동된 천주교 조직

1786년 봄부터 천주교 조직은 조금씩 다시 가동되었다. 이벽의 사망으로 천주교회는 구심점을 상실했다. 최고의 이론가였던 이벽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 시급했다. 신앙과 교리 전반에 대한 이승훈의 이해는 이벽만큼 투철하지 못했다. 이승훈이 공개적인 배교 선언까지 했던 것은 그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이후로도 이승훈은 위기 때마다 배교를 공언했다. 나중엔 처남 다산도 등을 돌려, 남매 사이마저 틀어지고 말았다. 이승훈은 북경의 서양 신부에게서 정식 절차를 밟아 영세를 받아온 조선 유일의 입교자였다. 그를 배제한 교회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반면 권일신은 양근(지금의 양평) 일대에서 대단한 위세로 교세를 확장해가고 있었다. 멀리 충청도에서 이존창 같은 사람이 찾아와 머물며 공부를 했다. 전국에서 천주교 영재들이 모여 들었다. 양근은 조선 천주교회의 온상이요 못자리였다. 달레가 ‘조선천주교회사’에서 10명의 신부 중 권일신이 주교였다고 한 것은 그의 실제적인 영향력과 위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1786년 당시 다산은 과거 시험 준비에 힘쓰는 한편으로 자형 이승훈과 권일신 등이 주축이 된 천주교 재건에 드러나지 않게 힘을 보태고 있었다. 과거 공부에만 온전히 몰입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번번이 시험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시는 결과로 이어졌다.

돼지처럼 씩씩대며

1786년 2월 3일 별시 초시에 합격하고, 사흘 뒤인 2월 6일의 복시, 즉 2차 시험에서는 불합격했다. 당시 심경을 다산은 ‘감흥(感興)’ 2수에 남겼다. 제목에 ‘이때 과거에 낙방했다(時下第)’라는 풀이가 달려 있다. 둘째 수만 읽는다.

세상살이 술 마시는 일과 같아서

처음에는 따져가며 잔에 따른다.

마신 뒤엔 문득 쉽게 술이 취하고

취한 뒤엔 본디 마음 혼미해지네.

정신 놓고 술 백 병을 들이키면서

돼지처럼 씩씩대며 계속 마시지.

산림에는 드넓은 거처가 많아

지혜론 이 진작에 찾아간다네.

마음에만 품을 뿐 갈 수가 없어

하릴없이 남산 그늘 지키고 있네.

涉世如飮酒(섭세여음주)

始飮宜細斟(시음의세짐)

旣飮便易醉(기음편이취)

旣醉迷素心(기취미소심)

沈冥倒百壺(침명도백호)

豕息常淫淫(식식상음음)

山林多曠居(산림다광거)

智者能早尋(지자능조심)

長懷不能邁(장회불능매)

空守南山陰(공수남산음)

처음엔 조금만 마셔야지 하고 잔 수를 세다가, 결국에는 에라 모르겠다하며 죽기 살기로 마셔 인사불성이 되어야 끝난다. 세상살이가 음주와 비슷하다고 했으니, 결국 쳇바퀴 같은 악순환을 끊으려면 과거 시험을 내던지고 하루라도 일찍 산림 속의 거처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늘 마음에 품고만 있을 뿐 막상 실행에 옮길 용기가 없어 답답하다.

뜬 인생의 위로

이 시를 짓고 다산은 지금 남양주의 초천 고향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때 지은 ‘봄날 배로 초천에 돌아오며(春日舟還苕川)’이란 시의 3,4구에서 다산은 “자못 능히 경박한 세속 떠나니, 뜬 인생에 위로됨이 이미 족하다.(頗能離薄俗, 已足慰浮生)”라고 노래했다. 신앙생활과 과거 시험 준비의 교착으로 어느 것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차라리 과거를 포기하고 서울을 떠나 전원에 은거하고픈 마음을 담았다. 고향 집 근처 양근의 천주교회 확산 소식이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다산 친필의 '초천사시사'. 계절별 고향집 인근의 풍경점을 하나하나 불러내서 그곳에서의 삶을 꿈꾼 내용이다. 개인소장

얼마 후 상경한 다산은 4월 중순께 가족과 함께 오래 머물 생각으로 초천에 내려갔다. 이때의 심경은 시문집에 수록된 ‘초천사시사(苕川四時詞)’ 13수에 잘 담겨있다. 고향 마을에서 자신이 꿈꾼 삶을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세세하게 스케치했다. 그러던 중 5월 11일 동궁이 급작스레 서거했다. 다산은 그날로 서울로 올라왔다. 초천에서의 전원생활이 한 달 만에 끝이 났다.

낙방의 실의와 정체성 회복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다산은 5월과 6월에는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연명으로 세자의 의약을 담당하던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6월 21일에는 같은 문제로 성균관 유생들의 권당(捲堂), 즉 파업 시위까지 있었다.

이후 다산은 성균관 유생의 본분으로 돌아와 시험 준비에 다시 매진했다. 그 결과가 1786년 8월 6일, 창덕궁 춘당대에서 열린 제술전강(製述殿講)에서 지차(之次) 즉 2등 합격이었다. 대과(大科) 전시(殿試)에 곧장 응시하려면 수석을 했어야 했다. 등수 하나 차이로 대과 응시의 기회가 다시 한 번 물 건너갔다.

속되지 않음이 귀하다

정조가 다산을 위로했다. “네가 지은 글은 숙종조 때 여러 사람의 문체와 아주 흡사하여 속됨에 떨어지지 않았으니 귀하다 할만하다. 성취가 조금 늦어진다 하여 시속을 따를까봐 염려스럽다. 다른 것을 표방해서는 안 된다.”

정조는 다산에게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다산이 2등으로 전시에 곧장 오르지 못한 것이 애석했기 때문이다. 다산이 남인이고 채점관이 노론계였던 것이 1,2등의 자리를 바꾸게 했던 듯하다. 임금의 속뜻은 이랬을 것이다. “나는 네 글이 1등이라고 생각한다. 문체도 훌륭하고 뜻도 좋다. 이번엔 아쉽게 되었지만, 시류에 맞춰 지금의 네 모습을 바꿔서는 안 된다. 지금 그대로 노력하거라.”

최선을 다한 결과가 좌절로 끝나자, 다산은 크게 갈등했다. 이것이 다산으로 하여금 천주교로 다시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해도 안 된다. 이 의미 없는 일에 인생을 걸어야 하나? 그 즈음에 이승훈의 주도로 10명의 사제가 임명되었고, 다산은 그 한 축을 맡아 다시 서학의 바다로 풍덩 뛰어들었다.

대범해진 행보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 역사 비망기’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 “서울에서도 규정에 따라 모임을 가졌다. 우리는 별명이 관천(冠泉)인 최요한이 신부들을 영접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줄 수 있도록 일부러 집 한 채를 세낸 것을 보았다. 그는 활동적이고 유능한 성격으로 신부들을 영접하고 모든 일을 처리하고, 교우들을 적절하게 준비시켰고, 귀찮아하거나 피곤함을 마다하지 않고, 밤낮으로 신부와 교우들에게 헌신하기에 바빴다.”

최요한은 당시 조선 교회의 평신도 총회장으로 불렸던 최창현이었다. 그는 이승훈이 임명한 10인의 신부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달레의 기술을 보면, 그는 같은 신부라도 보좌 신부 정도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가 역관 집안 출신의 중인이었기에 엄연한 신분의 위계를 뛰어넘기 힘들었을 법하다. 최창현은 별도의 집 한 채를 세 내어 성사와 집회 장소로 제공했다. 이곳은 명례방 집회 이후 서울 지역에 두 번째로 마련된 천주교 집회용 전용 공간이었다. 행보가 점점 대범해지고 있었다.

그 집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유항검(柳恒儉∙1756~1801)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1787년 경 이승훈에게 보낸 편지가 로마 교황청 포교성 고문서고에 남아있다. 한문 원문은 없고 번역문에 표기된 발신자의 이름이 현젠(Hiuen-chen)이다. 항검의 중국음이 헝지안(Heng-jian)인데 중국 지역음의 표기가 섞일 경우 비슷하게 들린다. 이 편지 중에 당시 서울 지역의 집회 공간으로 란동(Lan tong)과 판코우(Fan kou)란 두 지명이 나온다.

란동과 판코우

란동은 난정동(蘭亭洞) 또는 난동(蘭洞)으로 불리던, 오늘날 서울 회현동 2가 어름에 있던 공간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이곳은 다산이 이전에 살던 재산정사와, 당시 거주하던 담재가 있던 동네이기도 하다. 남인들이 밀집해 살던 이 지역에 최창현은 집 한 채를 통째로 세내어 집회와 회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판코우는 반교(泮橋) 또는 반구(泮口) 쯤으로 추정된다. 반교는 명륜동 어귀 성균관이 있던 반동(泮洞)으로 가려면 건너야 하는 다리다. 반교는 중국음으로 판치아오(Pan qiao)이고 반구는 판코우(Pan kou)다. 반동 어귀란 의미다. 이민보(李敏輔)의 ‘풍서집(豊墅集)’에 “화석상전반구촌(花石相傳泮口村)”의 싯귀가 있다. 반구촌은 바로 반교 어귀의 마을이란 뜻이다.

판코우가 반교 또는 반구를 지칭한 것이라면, 난동 외에 성균관 어귀에 또 하나의 천주교 공간이 있었던 셈이다. 이곳은 이듬해인 1787년 11월,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성균관 유생 몇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놓고 강습하다가 이기경에게 들켜 물의를 빚었던, 중인 김석태(金石太)의 집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대담하게도 성균관의 턱 밑에 아지트를 마련해두고, 포교와 신앙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던 셈이다. 안정복의 앞선 우려는 이 같은 사정을 꿰뚫어 알고 있던 데서 나온 것이었다. 란동과 판코우, 이 두 곳은 실로 당시 조선천주교회의 헤드쿼터였다. 이곳에서 교리서 보급과 의례의 절차 등 교회의 모든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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