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소설가이자 언론인ㆍ사회운동가
최초 근대 장편소설 ‘무정’ 남기고
1919년엔 2ㆍ8 독립선언서 기초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기도

#1922년 개벽에 ‘민족개조론’ 발표
“조선 민족을 살리는 유일한 길”
안창호와 상통한 온건 독립운동론
일각 “일제 분열정책에 호응” 비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양가감정
초기 식민적 억압 주체로 보다가
나중엔 선진적 문명 모델로 평가
배타적 고수냐, 일방적 모방이냐
서구문명 수용에 대한 ‘숙제’ 남겨
춘원 이광수. 조선의 3대 천재라 불리던 르네상스 지식인이었으나 친일 행위 때문에 광복 이후 격한 비난을 받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림 21937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제에 의해 수감됐을 당시 이광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100년 우리 지성사를 돌아볼 때 긍정적 평가를 받은 지식인들만 있던 것은 아니다. 부정적 비판을 받은 지식인들도 없지 않다. 더하여,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비판을 동시에 받은 지식인들도 존재한다. 이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대표적 지식인으로는 이광수를 주목할 수 있다.

이광수는 문제적 지식인이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이광수는 지난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소설가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인 ‘무정’과 농촌계몽운동을 다룬 ‘흙’이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갖는 위상은 결코 작지 않다.

둘째, 이광수는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였다. 1910년대부터 그는 많은 논설을 발표했고, 안창호를 만난 후 국내의 흥사단 운동을 이끌었다, 그가 발표한 ‘민족개조론’ 등의 논설들은 온건 독립운동 노선을 대표했다.

이광수의 삶에서는 소설가의 정체성보다는 언론인이자 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이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라는 무게 있는 저작을 발표한 국문학자 김윤식은 문학이 이광수에겐 그 자신의 표현처럼 ‘여기(餘技)’였다고 지적한다. 주목할 것은 실력양성론과 자치론을 대표했던 이광수의 변신이다.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가 침략적 성격을 여지없이 드러내자 이광수는 친일의 길로 나아갔다.

근대 소설 선구자에서 친일파 거두로

이광수는 189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고아가 돼 동학에 입도했고, 일진회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메이지 학원을 졸업한 다음 정주 오산학교 교사가 됐고,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을 다녔다.

이광수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1917년 발표한 소설 ‘무정’이었다. 1919년 ‘2ㆍ8 독립선언서’를 기초했고,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귀국해 1922년 ‘민족개조론’을 발표했고, 1926년 안창호의 영향 아래 흥사단의 국내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수양동우회’를 결성했다.

이처럼 이광수의 삶은 극적이었고 화려했다. 아직 직업의 분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모더니티 초기에 지식인은 르네상스적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광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무정’, ‘2ㆍ8 독립선언서’, ‘민족개조론’ 등에서 볼 수 있듯, 그는 다방면에서 당대 지식사회를 대표했다.

이광수의 소설 '무정'. 그는 소설 쓰기를 취미 삼아 하는 활동으로 여겼으나 소설 '무정'은 친일 비판이 쏟아질 때도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광수가 발표한 글들 가운데 ‘무정’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자못 컸다. ‘무정’에 담긴 언문일치와 내면 심리 묘사는 앞선 신소설이 갖는 한계를 극복했다. 또 ‘무정’이 다룬 자유연애와 계몽주의는 문명개화에 대한 당대의 열망을 적절히 반영했다. 김윤식이 평가하듯, ‘무정’은 우리 근대 문학사에서 기념비적 작품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 이광수의 변신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안창호가 죽자 실의에 빠졌던 그는 1939년부터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가야마 마쓰로(香山光浪)로 창씨개명하고 친일 작품을 발표하고 학병 권유 연설에 나섬으로써 친일파의 대표적 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광복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구속됐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돼 이해 평안북도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생애였다.

이광수 민족주의의 한계

이광수는 1922년 잡지 ‘개벽’에 장문의 논설 ‘민족개조론’을 발표해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앞 부분은 민족개조의 의미와 역사를 다루고, 중간 부분은 민족개조의 취지와 가능성을 살펴보며, 마지막 부분은 민족개조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이광수는 논설의 결론에서 말한다.

“오직 민족개조가 있을 뿐이니 곧 본론에 주장한 바외다. 이것을 문화운동이라 하면 그 가장 철저한 자라 할 것이니 세계 각국에서 쓰는 문화운동의 방법에다가 조선의 사정에 응할 만한 독특하고 근본적이요 조직적인 일 방법을 첨가한 것이니, 곧 개조동맹과 그 단체로서 하는 가장 조직적이요 영구적이요 포괄적인 문화운동이외다. 아아, 이야말로 조선민족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외다.”

‘민족개조론’은 독립운동가 안창호로부터 크게 영향 받았다. 안창호의 독립사상은 실력양성을 통해 독립전쟁을 준비하자는 일종의 준비론이었다. 안창호는 실력양성을 위한 민족 혁신을 주목하고, 구체적으로 무실ㆍ역행ㆍ충의ㆍ용감의 자기개조 및 자아혁신을 강조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이러한 실력양성과 문화운동을 통해 민족개조를 모색하려는 온건 독립운동론이었다.

월간지 개벽에 실린 '민족개조론'. 도산 안창호의 영향을 받은 이광수는 독립을 준비하고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친일 논란에다, 잡지에 실린 짧은 논설이라 단행본으로 '민족개조론'을 찾아보긴 쉽지 않다.

주목할 것은 ‘민족개조론’의 등장 배경이다. 3ㆍ1운동 이후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절대독립론ㆍ독립전쟁론에 맞선 독립준비론ㆍ실력양성론을 이용하려고 했고,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종교ㆍ생활개선ㆍ농촌계몽운동 등으로 민족운동의 방향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이러한 변화를 대표했다.

‘민족개조론’의 연장선상에서 이광수는 1924년 ‘민족적 경륜’을 발표했다. 이 논설에서 그는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자치론을 제시했다. 이러한 실력양성론과 자치론에 대해선 당대는 물론 현재에도 적지 않은 비판이 이뤄졌다. 역사학자 강만길은 ‘20세기 우리 역사’에서 실력양성론과 자치론이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 시기 일제의 조선민족 분열정책에 호응했고, 일본 제국주의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침략전쟁기에 들어섰을 때 그 참모습이 드러나게 됐다고 준열하게 비판한다.

사회학자 신기욱은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에서 이광수의 민족주의가 1920년대 ‘문화민족주의’에서 1930년대 ‘종족민족주의’로 변화했다고 분석한다. ‘민족개조론’이 전자를 대표하는 텍스트였다면, ‘조선민족론’(1933)은 후자를 대변하는 텍스트였다. 이러한 변화에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의 등장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사회주의가 국제적 보편성을 강조한 반면, 종족민족주의는 한국적 특수성을 내세웠다.

이광수의 민족주의를 그렇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이광수의 민족주의에는 일종의 정치적 무의식이 담겨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에게 일본 제국주의는 애증병존의 대상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은 식민적 억압의 주체인 동시에 선진적 문명의 모델이었다. 이런 내면의 애증병존, 달리 말해 정신적 양가감정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표출된다. 이광수의 경우 그 표출이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독립운동으로 나타났지만, 후기에는 친일에의 길로 드러났다.

창의적 발전 모델과 사유 방식을 향하여

이광수가 우리 현대 지성사에 남긴 유산은 세 가지다. 근대 소설의 선구자, 민족주의의 개척자, 친일파로서의 활동이 그것이다. 근대 소설의 선구자가 긍정적 유산이라면, 친일파로서의 활동은 부정적 유산이다. 민족주의의 개척자에 대해선 긍정적 측면보다 부정적 측면이 두드러진다.

‘민족개조론’이 우리 지성사에 안겨주는 함의의 하나는 이광수의 심층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이광수는 일본 문명에 애증병존을 갖고 있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광수로 대표되던 일본에 대한 이런 양가감정은 광복 이후 서구에 대한 양가감정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어떤 이들에겐 서구사회가 앞선 문명의 모델이었다면, 다른 이들에겐 극복할 문명의 대상이었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사회에 대한 이러한 양가감정은 우리 사회에 대한 인식에 여전히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젊은 시절 이광수의 가족. 그가 일본에 대해 지녔던 양가감정을 지금 시대 사람들도 음미해봐야 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서구사회에 대한 온당한 거리 감각이다. 서구가 일궈온 발전과 문명에서 수용할 것은 수용해야 하는 동시에 거부할 것은 거부해야 한다. 더욱이, 미국의 자유시장경제와 독일의 조정시장경제에서 볼 수 있듯, 서구의 발전 모델은 보편적 형태가 아닌 다양한 유형들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00년 우리 지성사를 돌아볼 때 서구의 발전 모델은 물론 사유 양식에 대한 적절한 거리가 유지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서구 문명과 사상이 우리에게 교과서가 아니라 참고서라는 점이다. ‘서구적인 것’의 일방적 모방도 아닌, ‘한국적인 것’의 배타적 고수도 아닌, 우리 역사와 현실에 걸맞은 창의적 발전 모델은 물론 사유 방식의 창출은 현재 우리 사회에 부여된 중대한 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 이 과제를 어떻게 성취해 나갈 수 있는지에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박종홍의 ‘한국사상사’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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