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노인들의 사회] 존경받는 어르신의 귀환

#1
국가 유공자로, 방위협의회 간부로
보수의 삶 살아온 68세 최윤수씨
엘시티 사건에 “보수도 변해야” 절감
회원들 설득하고 세대간 대화 시도

#2
“손녀와 많은 추억 남기려 시작”
쿡방ㆍ먹방 등 실버 유튜버 인기
시니어 전문가들 강사로 초빙
전통조각보 제작 등 기술 전수도

#3
연극연출가 등 30, 40대 3명
7080 10여명과 아리랑도서관서
노인들의 이야기 낭독극 준비
“잊힌다는 두려움 떨치는 계기”
지난 12일 오후 부산 사하구 괴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최윤수 할아버지. 그는 최근 2년새 평생 고수해 온 보수적 신념을 딸들과의 소통을 통해 조금씩 열어보았다. 그는 “난 아직 누가 물어보면 보수라고 해요. 하지만 말 통하는 보수와 그렇지 않은 극우는 달라요“라고 말했다. 사진 이혜미기자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1950년)에 태어나 그해 9월 낙동강 전투에서 아버지를 잃은 최윤수(68) 할아버지는 스스로 요즘 젊은 세대와 자신의 생각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평생 부산에서 살아온 자칭 타칭 ‘보수’이지만 그는 젊은이들의 생각이 늘 궁금하고 다가가고 싶다. 최씨는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에 지역 사교클럽이나 자치위원회 등을 기웃거렸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젊은이들이 내가 다가가는 것만큼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했다.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친해지고 나서 정치 이야기도 같이하고 싶은데 나이 든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꺼리는 느낌이야.” 그는 “지방은 더더욱 젊은 사람들이 없어, 어떻게 어울려야 할지 잘 모르겠다”며 “함께 어울릴 기회가 많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변화하고 소통하려는 최씨의 자세는 우리 사회가 ‘존경받는 어르신’을 칭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최씨는 자녀들과 소통하며 정치적 신념을 교정하는 과정도 겪었다. 또 유튜브 등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에서 젊은 세대들과 소통하며 자신의 지식과 노하우를 활발하게 전하는 노인들은 나이에 따른 괴리나 세대 차이라는 말은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영역임을 증명해 보인다.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값어치가 상실되는 고통을 겪고, 이로 인해 소통을 위한 귀를 닫고 분노를 터트리는 노인들로 우리 사회의 세대 갈등의 심각성은 상징되어 왔다. 하지만 이 같은 ‘성난 노인들의 사회’를 ‘존경받는 어르신들의 사회’로 되돌리기 위한 노인 세대와 구성원들의 노력 또한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

“제대로 된 보수의 역할을 하자”

변화는 열린 자세를 전제로 하며, 그 과정이 쉽지는 않다. 전쟁에서 아버지의 유해도 찾지 못했다는 최씨는 국가유공자이며, 자연스럽게 안보와 애국, 호국 보훈을 중요한 삶의 가치로 삼아왔다. 청년시절 해운업에 종사하며 줄곧 보수 정당에 표를 줘 왔다. 50세에 들어서면서 동네인 사하구통합방위협의회에서 활동하며 지금까지 부의장을 지내고 있다. 안보의 가치가 낮아지고 성장보다 분배에 기우는 젊은 세대와 접점을 찾기 힘든 인생이다.

그의 보수적인 투표 성향은 자녀들과 이견을 빚었다. 최씨는 “아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투표를 해 별일이 없었는데, 딸 둘은 문재인 대통령을 아주 좋아하고 야당 성향이라 마찰이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마찰이 갈등으로 폭발한 적은 없다고 했다. “우리 세대에게 아버지는 권위 있는 인물이라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자녀들이 대들 수 없었죠. 또 정치적 의견은 설득이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굳이 정치문제로 (아이들과) 대화하지 않았어요.”

‘나는 항상 보수’라고 여겨온 최씨에게 부산 해운대 주상복합 엘시티(LCT) 비리 사건은 큰 상처였다. 그는 “해운대 바다가 참 예뻤다”며 “바다는 부산 사람 모두의 것인데 엘시티 같은 건물을 세우고 그곳이 유력가들의 비리판이 되지 않았느냐”라며 한탄했다. 비리 사건에 연루된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보수라고 스스로 자신 있게 말했던 것은 저런 썩은 보수를 위한 게 아니었는데...’라고 생각했다고 최씨는 말했다.

그러면서 최씨는 지난해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과거와 달리 딸들과 활발히 의견을 나눴다고 했다. “촛불집회 이후 딸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어떻겠냐고 설득을 했어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등을 지켜보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죠.” 평생 매달려온 보수의 이념이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고 젊은이의 생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전향(?)’한 최씨의 모습을 그가 활동하는 방위협의회 회원들은 처음엔 달갑지 않아 했다. 최씨는 “내가 젊은이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태극기 부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니 회원들 가운데서는 ‘우리가 보수인데 왜 변해야 하느냐’는 불평도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보수이기 이전에 국가나 지역의 비상시 군ㆍ경ㆍ관을 지원하는 단체다. 누가 정권을 잡건 중요한 사실은 나라와 우리의 생활을 지키는 것이 아니겠냐. 제대로 된 보수의 역할을 하려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생각하자”며 회원들을 설득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여전히 촛불집회는 ‘강성노조가 주최하는 순수하지 못한 집회’라며 못마땅해하지만 “시대가 바뀌었고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나, 촛불집회 이후 결과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 가져온 신념을 바꾸는 게 어려운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소통하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의지가 있는가라고 생각한다”라며 “동네 젊은 사람들과 오며 가며 자주 대화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인을 사회의 ‘도서관’으로 아끼는 사회
47만명의 유튜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유튜브 스타 박막례 할머니. 박막례 할머니 채널 캡쳐

이미 ‘노인의 삶에 청년들은 관심이 없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유튜브에서는 박막례(72)할머니를 필두로 노년 ‘유튜버’들의 인기가 뜨겁다. 시골에서 반찬을 만드는 ‘쿡방(요리를 뜻하는 쿡과 방송의 합성어)’을 표방하는 조성자(61)할머니의 ‘심방골주부’, 다양한 종류 음식 ‘먹방’으로 유명한 김영원(81) 할머니의 ‘TV영원씨’ 채널 등이 많은 젊은 구독자를 확보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박막례 할머니 채널은 손녀 김유라씨가 치매에 걸릴지 모른다며 걱정하는 할머니와 더 많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하나 둘 만든 영상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 케이스다.

‘노인이 한 명 사라지는 일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아메리칸 원주민 속담처럼, 이들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겠다는 취지의 기업도 있다. ‘시니어의 경험을 공유하는 사회적 기업’을 표방하는 쉐어러스에서는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원데이 클래스(일일 강좌)’의 강사로 해당 분야 전문가 시니어를 초빙한다. 이들은 ‘절편꽃 떡케이크 만들기’, ‘전통 조각보 만들기’, ‘스페인어 기초배우기’ 등 다양한 수업을 진행한다.

노인과 청년의 접점을 넓히고 소통하려는 노력은 제도적으로도 시작됐다. 예를 들어 서울시에서는 올해 ▦노인 이동에 위험한 장애물을 없애고 휴식 공간을 마련하거나 큰 글씨로 쓴 상품 설명 등 고령자에게 친절한 상점을 위한 교육을 진행하는 ‘고령친화상점’ 캠페인 ▦독거노인 1만명과 지역 내 학교 청소년이 무대를 만드는 ‘마을공감무대’ ▦어르신과 청소년이 함께 듣는 사진 강좌 ‘빛스타그램’ ▦기술장인과 청년 메이커들이 함께하는 ‘세운상가 다시 세운 프로젝트’ 등을 진행 중이다.

젊은이들과 ‘나의 일상’을 예술로 가꿔가는 시니어
서울 성북구 아리랑도서관 세미나실에서 18일 열린 ‘낭독: 새로쓰는 편지’ 모임에서 시각예술 작가 김현주씨(가운데)와 70, 80대 어르신이 일상의 감상을 문장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김주성기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노인 세대의 노하우와 생활을 받아들이고 낭독극을 준비하는 장면은 세대가 어우러지는 왁자지껄한 현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준다. 지난 18일 오전 서울 성북구 아리랑도서관 세미나실에서는 끊임없이 웃음소리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홀로 사는 어르신들이 청년예술가들의 가이드로 자신의 일상을 글로 다듬고 이들이 직접 무대에 서 낭독극을 여는 게 목표인 ‘낭독: 새로쓰는 편지’라는 모임이다. 전체 8회 가운데 두 번째 만남이라는 이날 10명의 70~80대 할머니, 할아버지와 30~40대 예술가 3명이 둘러앉아 ‘나의 일주일’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명희(72) 할머니는 가족과 차례로 통화한 이야기를 꺼냈다. “미국에 계신 96세 어머니와 전화통화하면서 어머니께 잘 부르시는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어요. 이렇게 40분간 이야기한 다음엔 며느리랑 통화했어요. 손주가 7살인데 유치원에서 친구가 괴롭힌다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이의 마음을 달래준 뒤에 괴롭히는 친구를 집에 초대하라고 제안을 했어요.” 전명숙(73) 할머니는 틈틈이 일상을 기록해 놓은 수첩을 들었다. “요새 법정스님의 책을 읽는데, 거기에 연꽃이 나흘 동안 핀다고 적혀있었어요. 그런데 둘째 날에 향이 가장 좋다고 하네요. 읽다 보니 내가 그 차를 마시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시각예술 작가 김현주(43)씨는 전 할머니의 이야기에 “연꽃이 나흘 동안 핀다는 건 저도 처음 들었어요. 우리의 한 주도 향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며 맞장구쳤다.

“이제 지금까지 해주신 이야기를 ‘나의 일주일’이라는 제목으로 하나하나 기록하는 시간을 가질게요. 한 주를 어떻게 살았는지, 각각 요일에 대한 느낌을 형용사로 써 보시는 거예요” 연극 연출가 권석린(40)씨의 주도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자신의 하루를 문장으로 바꿔보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왕수다들의 만남’, ‘운동하고 땀내고 씻으면, 그날 하루 내 세상’, ‘품에 안기는 손자의 따뜻한 체온에 행복’과 같은 다양한 문장이 탄생했다. 마지막으로 이 문장을 몸짓과 말소리의 강약을 줘가며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예술가들의 도움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일상 나눔이 연극 무대에 올라가는 대사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이날 활동이 끝난 뒤 만난 이영구(82) 할머니는 “어릴 적엔 피아노, 무용도 배우고 싶은 욕망이 있었는데 종갓집 장남 며느리로 살면서 그런 게 허락되지 않는 삶을 살았다”며 “이 자리에서 내 글을 낭독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싶다는 의욕이 커 너무나 기분이 좋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이기복(74)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사업하면서 거래처 사람들은 많이 만났지만, 이렇게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을 일은 많지 않아 이 자리가 소중하다”고 말했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권씨는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공연을 연출하면서 이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를 인터뷰했던 게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를 새로 알게 됐는데, 이야기에 시간이 실리면 그 무게가 달라진다는 점을 깨달았다”며 “어르신들이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는 작업을 통해 ‘나이들면서 잊힌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씨는 “작년에 독거 어르신들을 만나며 연기 등 예술활동을 해보려고 했는데, 서울 시내 어르신들 10여명과 함께 할 공간이 없었다”며 “도시는 끊임없이 어르신들이 소비하게만 만들고 벤치 등 유휴공간은 없애고 있는데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어르신들이 커뮤니티를 만들고 교류할 수 있는 장으로 남았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부산=이혜미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한소범기자 beom@hankookilbo.com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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