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愛ㆍ15] 서울 삼청동서 단팥죽 가게 운영하며 2억원대 기부
10억원대 아파트도 추가로 사회에 내놓을 예정
정신질환 앓고 있는 딸을 보면서 주변 돌아봐
지난 19일 서울 삼청동 단팥죽 가게에서 만난 김은숙 할머니는 “우리 사회 소외계층의 배고픔도 나누다 보면 줄어들 것”이라며 “남은 인생도 기부에 올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게 아닌데…, 민망하고 창피합니다.”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끝까지 숨기고 싶었던 사실이 뜻하지 않게 외부에 알려지면서다. 특별한 대가를 바라고 나섰던 일이 아니었기에 부끄러움은 더했다. 지난 19일 자신이 운영 중인 서울 삼청동 단팥죽 가게에서 만난 김은숙(79) 할머니는 “내가 무슨 복으로 이 나이에 이렇게 주목을 받고 있는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난 3일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기부해 온 10명의 감동 기부미담 사례 주인공 가운데 최연장자로 청와대 오찬 행사에 다녀온 그는 아직도 얼떨떨하다고 했다. 그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들에게 이런 자리가 돌아갔으면 더 좋았을 걸 그랬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단팥죽과 수정과, 식혜 등을 팔면서 지난 2009년부터 90여차례에 걸쳐 총 2억4,000만원을 현금 기부했다. 올해 초 사회에 내놓겠다고 약속한 10억원 상당의 아파트까지 추가되면 그의 기부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의 기부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한 시점을 찾기 위해선 3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지난 3일 청와대에서 열렸던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기부자 초청 오찬에 참석한 김은숙(왼쪽 첫번째) 할머니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1980년대 월 수입 6만원 시절에도 남편은 불우이웃부터 챙겨

그의 기부 DNA는 8년 전 사별한 남편에게서 이식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속된 말로 저희가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1980년대 초반 남편 월 수입이 6만원 정도였는데, 이것 저것을 빼고 나면 제 손에 쥐어지는 건 절반도 안 됐어요. 아들 딸에게 들어가는 학비 등이 만만치 않았는데, 그 와중에도 남편은 수입의 일정 부분은 반드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써야 한다고 고집했어요.” 당시 생활고를 떠올리던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댁 상황도 여의치 않았고, 친정에 경제적인 도움을 기대하긴 더욱 어려웠다. 그는 해방 직후 초등학교 2학년 때 함경북도 청진에서 어머니와 함께 38선을 넘어왔다. 그래서 생업 전선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엔 지인의 도움으로 쌍화탕을 만들어 팔았는데, 워낙 어려웠던 때여서 그런지 장사가 잘 되지 않았어요.” 1976년 2월 간신히 장만한 삼청동 찻집은 금세 문을 닫아야 할 지경으로 내몰렸다. 할머니에겐 돌파구가 필요했다. “곧 망할 것 같았던 그 순간에 떠오른 게 단팥죽이었어요. 6ㆍ25 전쟁 통에 서울 동대문 길가에서 한 그릇 얻어 먹었던 팥죽이 그렇게 맛이 있었거든요. 배고팠던 시절이어서 더 그랬던 거 같았습니다.” 주메뉴를 쌍화탕에서 단팥죽으로 바꾸자, 손님이 몰려들었다. 입소문은 퍼졌고 40년 넘게 할머니 손맛을 유지한 이 가게의 단팥죽은 청와대에서도 찾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덕분에 작은 돈이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업에 지장을 받고 있는 고학생이나 달동네 불우이웃을 돕는 이들 부부의 사랑 나눔은 계속됐다.

지난 19일 서울 삼청동 단팥죽 가게에서 만난 김은숙 할머니는 “모든 음식의 맛은 정성과 손맛으로 결정된다”며 단팥죽을 직접 요리하고 있다.

정신질환 앓는 딸 보면서 남은 인생 기부에 전념키로

그의 기부 인생에선 정신질환을 가진 딸도 빼놓을 순 없는 존재다. “이북에서 빈 손으로 넘어와서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딸의 방황에 좀 소홀했던 게 사실입니다. 딸만 생각하면 할 말이 없어요.” 아픈 딸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눈시울은 갑자기 붉어졌다. 어려웠던 가정 환경 속에 사춘기를 보낸 그의 딸은 무리한 다이어트 등을 시도하다 약물의 오남용으로 21세 때 신경장애를 겪게 됐다.

“자식이 스스로 앞가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알게 됐을 때 부모로서의 죄책감은 말로 다 못해요. 우리 딸 아이의 아픔 뒤엔 제 책임이 컸으니까요.” 딸의 힘겨운 재활치료는 시작됐고 병수발은 그의 몫이었다. 이 과정에서 동병상련의 본능이 기부에 확실한 동기부여가 됐다.

“딸을 데리고 병원을 다니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남의 일 같지 않더라고요. 어떤 형태로든 제가 나서야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남은 인생을 기부에 ‘올인’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연이은 폭염 탓에 단팥죽 판매가 예전만 못하지만 그는 매월 가계부에서 400만원 이상씩 빠져나가는 기부 규모를 줄일 생각이 없다고 했다. “제 단팥죽을 먹고 손님들이 ‘배불리 잘 먹었습니다’라고 한 마디만 해주면 신기하게도 그 날 쌓였던 피로는 다 풀려요. 덕분에 당분간 단팥죽은 계속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외계층에게 드리워진 배고픔도 나누다 보면 줄어들지 않을까요.”

글ㆍ사진=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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