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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 덕후들이 연 문구점엔 특별한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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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 덕후들이 연 문구점엔 특별한 것이 있다

입력
2018.07.25 04:40
수정
2018.08.23 15:04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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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랑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서울 서교동 문구점 오벌. 빈티지와 수입 문구류를 판다. 배우한 기자
김수랑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서울 서교동 문구점 오벌. 빈티지와 수입 문구류를 판다. 배우한 기자

150년 된 연필ㆍ100년 연필깎이

“연필 깎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져”

“맘에 드는 게 없어서 직접 제작”

기록광이 만든 6개월용 다이어리

“학창시절 열자루씩 쥐고 필기…”

주인 이름 쓰인 모나미 헌정볼펜

손에 만질 수 있는 ‘물성’의 매력

디지털 기기 홍수 속에서 더 각광

어떤 사물들은 사람을 마니아로 만든다. ‘인간을 열중시키는 힘’을 기준으로 사물의 순위를 매겨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상위권에는 문구가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간 지금에도, 문구 마니아들의 위세는 여전하다. 연필, 종이, 만년필, 자, 다이어리, 테이프... 단단한 물성으로 책상 위에 자리 잡은 이들은 쓰고, 재고, 붙이는 행위의 기쁨을 일깨우며 유유히 디지털 시대를 통과 중이다. 매년 새로이 양산되는 ‘문구 덕후’ 중에서도 최전방에 있는 이들은 직접 문구점을 차린 사람들이다. 서울 마포구 일대에 밀집된 문구숍 중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매장 3곳을 찾았다. 가장 아끼는 물건을 보여달라는 말에 누구도 거절하지 않았다.

내려앉은 100년의 시간, 오벌

독일 파버 카스텔이 1855~77년 출시한 연필. 배우한 기자
독일 파버 카스텔이 1855~77년 출시한 연필. 배우한 기자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근처 새로 단장한 경의선책길 인근에 문구점 오벌이 있다. 빈티지 문구와 일반 매장에서 보기 힘든 수입 문구류로 가득한 이곳은 어릴 적 들어가선 안 되는 사촌 언니의 방처럼 조심스럽다. 2007년 오벌의 문을 연 김수랑 디자이너는 가장 아끼는 문구를 소개해달라는 말에 “가장 아끼는 건 꼽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문구 마니아들이라면 아마 다 동의하실 거예요. 대신 시중에서 보기 힘든, 그 중 가장 자주 사용하는 것들을 보여드릴게요.”

김 대표가 꺼낸 건 생산된 지 150년이 넘은 연필과 100년 묵은 연필깎이다. 연필은 반 고흐 등 전세계 예술가들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은 독일 파버 카스텔사의 제품이다. 나무로 만든 케이스에는 초창기 이름인 A.W 파버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는 “1855~77년 생산된 걸로 추정된다”고 했다. “시베리아 광산에서 캔 흑연에 플로리다 삼나무로 만들어졌어요. 지금 들으면 조금 웃긴 얘기 같지만 그때는 정말 최고급 연필이었어요.”

케이스 안엔 경도가 각자 다른 연필 다섯 자루가 나란히 꽂혀 있다. 그 중 하나는 김 대표가 사용해서 약간 키가 줄었다. “조금씩이지만 연필을 사용해요. 전 옛날 연필을 단순히 빈티지라고 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정말 질이 좋아요. 요즘은 갈라진다는 이유로 삼나무로 연필을 만들지 않는데 이건 100년이 넘은 지금도 멀쩡해요. 당시의 기술력이 집약된 거죠. 마치 지금의 아이폰에 모든 기술이 모여 있는 것처럼요.”

굴앤드하르베크에서 1910~28년 만든 주피터 연필깎이. 배우한 기자
굴앤드하르베크에서 1910~28년 만든 주피터 연필깎이. 배우한 기자

김 대표에 따르면 1,2차 세계대전 등 큰 전쟁이 끝난 직후에 질 좋은 문구가 쏟아져 나왔다. 지난 세기에 문구는 공학기술의 집합체였고, 전쟁 후 회복의 움직임이 기술력의 발달과 맞물렸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주피터 연필깎이도 당시 첨단 기술의 총체였다. 독일 굴앤드하르베크(GUHL&HARBECK)사에서 1910~28년 만든 제품으로, 연필을 가로로 넣고 한쪽 손잡이를 돌려가며 깎는 기계식 연필깎이다. 김 대표는 “독일 공학의 걸작”이라고 불렀다. “연필을 밀면서 깎기 때문에 깎임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어요. 장치의 만듦새라든지 구조가 매우 세밀하고 뛰어나요.” 두 손으로 들기도 무거운 이 연필깎이는 관상용이 아니라 김 대표가 실제로 쓰는 것이다. 그는 연필이 들어오면 일단 한 다스를 다 깎아서 써본다고 한다. “때론 기분 전환으로 연필을 깎기도 해요. 이 연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게 있어요.”

쓰면 마음에 새겨져요, 올라이트

서울 마포구 창전동 올라이트. 다이어리, 메모지, 엽서, 수첩 등 기록을 위한 모든 것을 판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 올라이트. 다이어리, 메모지, 엽서, 수첩 등 기록을 위한 모든 것을 판다.

신촌역과 홍대입구역 사이, 창전동 한적한 골목에 자리한 올라이트는 다이어리 가게다. 테이블 위에 작은 빌딩처럼 쌓인 다이어리들은 이효은 대표가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가장 아끼는 물건으로 그는 2014년에 만든 올라이트 다이어리 초판을 내놨다. “어릴 때부터 다이어리를 썼는데 마음에 꼭 맞는 걸 좀처럼 찾을 수 없었어요. 직접 만들어 써보자, 해서 500부를 찍은 게 한달 만에 다 팔리면서 올라이트가 시작됐어요.”

올라이트는 단어 그대로 모든 걸 기록한다는 의미다. ‘기록광’인 이 대표가 생각하는 좋은 다이어리의 조건은 “끝까지 채울 수 있는 다이어리”다. “다이어리 쓰는 분들은 무슨 말인지 아실 텐데, 지면을 다 못 채우거나 며칠 건너 뛰면 굉장히 자괴감이 들어요. 할 말이 많을 땐 많이 쓰고, 말하고 싶지 않은 날엔 적게 쓰는 다이어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2014년 나온 올라이트 다이어리 초판. 6개월 용이다.
2014년 나온 올라이트 다이어리 초판. 6개월 용이다.
이효은 대표의 다이어리. 그날의 할 일이 뺴곡히 차 있다.
이효은 대표의 다이어리. 그날의 할 일이 뺴곡히 차 있다.

올라이트 다이어리는 기록을 좋아하는 한편 기록에 쫓기는 이들을 위해 틀을 최소화했다. 용돈기입란이나 오늘의 할 일 같은 칸 없이 날짜만 월별, 주별로 표시했다. 시그니처 제품은 6개월 다이어리. 연초의 ‘화력’이 6개월을 못 가는 이들에게 다시 한 번 설렐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다이어리다.

여백에 쫓기면서도 자꾸 여백을 찾는 이들의 마음은 뭘까. 이 대표는 “쓰는 것의 힘”에 대해 말한다. “쓰면 마음에 새겨져요. 없던 의지가 생기기도 하고요. 어릴 땐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는 류의 말을 안 믿었어요. 그런데 원하는 걸 쓰고 지키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정말 하나씩 이뤄지더라고요.” 어릴 때 꿈꾸던 나만의 집, 나만의 가게, 모두 이 대표의 다이어리에 쓰였던 것들이다. “손때가 묻어 도톰해진 다이어리”에는 고지서 처리하기 같은 작은 일부터 지금은 요원한 큰 꿈까지 빼곡하다.

학창 시절 최고의 즐거움, 소소문구

서울 망원동 도로변 2층에 위치한 소소문구. 방지민, 유지현 디자이너가 함께 운영한다.
서울 망원동 도로변 2층에 위치한 소소문구. 방지민, 유지현 디자이너가 함께 운영한다.

서울 망원동 소소문구는 방지민, 유지현 두 명의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작은 문구점이다. 일명 ‘망리단길’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소소한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들의 발길이 머무는 곳이다. 노트 디자인으로 출발해 지금은 다이어리, 편지지, 카드, 연필 등 다양한 문구류를 취급한다.

아끼는 문구를 보여달라는 말에 두 디자이너는 브랜드 이름처럼 한 손에 들어오는 작고 가벼운 물건들을 꺼내왔다. 소소문구의 이름이 새겨진 삼각형 책갈피는 청바지 택에 쓰이는 원단으로 만든 것, 주인의 이름이 쓰여진 모나미 볼펜은 모나미의 역사와 전통에 바치는 ‘리스펙(respect)’, 깃털처럼 가벼운 탁상 달력은 스프링이나 풀 제본 없이 종이로만 이뤄진 것으로 닻프레스 제품이다.

소소문구의 이름이 새겨진 책갈피.
소소문구의 이름이 새겨진 책갈피.
위부터 닻프레스 달력과 모나미 볼펜, 소소문구 책갈피.
위부터 닻프레스 달력과 모나미 볼펜, 소소문구 책갈피.

“어릴 때 왼손에 펜을 열 자루씩 쥐고 필기하던 학생이었어요. 물론 과목마다 사용하는 펜도 달랐고요.” 방지민 대표의 말을 유지현 대표가 이었다. “학창 시절 문구는 최고의 즐거움이었던 것 같아요.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는 존재였죠.”

이들이 생각하는 문구의 영원한 매력은 뭘까. 유 대표는 스스로에게도 자주 묻는다고 말했다. “저를 포함해 왜 많은 사람들이 여태까지 문구를 좋아할까요. 문구의 물성 때문이 아닐까 해요. 지금은 모든 걸 스크린 너머로 확인하잖아요. 그런데 종이, 펜, 달력은 손에 잡히고 만질 수 있고 냄새도 나고 빛깔도 변하니까요. 거기에 내 생각과 글, 그림이 담긴다는 게 굉장히 본능적인 해소를 해주는 것 같아요.”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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