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헨리가 1901년 오늘 3년 만에 가석방됐다. 그에게 교도소는 문학의 산실이었다.

미국 작가 오 헨리(O. Henry, 본명 William Sydney Porter, 1862~1910)는 공원이나 호텔 로비 같은 곳을 일삼아 다니며 듣고 보는 것들로 이야깃감을 찾곤 했다. 그의 애잔하고 따뜻한, 짧은 이야기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오하이오 주립 교도소도 그중 한 곳이었다. 그가 남긴 400여편의 단편소설 대부분은 1902년 이후, 즉 그가 은행 출납ㆍ회계원 시절 횡령 혐의로 구속됐다가 풀려난 뒤 쓰였다. 5년 형을 선고받은 그가 3년 만인 1901년 7월 24일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 20세에 텍사스로 이주한 그는 약제사와 제도사, 은행원, 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지인의 목장에서 일하며 유럽 이민자들에게 기악을 배워 기타와 만돌린 연주자로 일했고, 교회 성가대 중창단 멤버로도 활약했다. 1887년 그와 결혼한 애설 에스테스는 글쓰기를 한껏 격려했다고 한다. 헨리는 20대 때부터 습작을 썼다.

그가 주간지 ‘롤링스톤(Rolling Stone)’(대중잡지 ’롤링스톤’과는 무관)을 창간한 건 1890년대 은행원 시절이었다. 한때 1,500부까지 나갔다지만 그는 잡지 사업에 실패했고, 횡령 혐의로 고소까지 당했다. 장인이 대납한 보석금으로 풀려난 그는 1896년 7월 온두라스로 도피했다가 아내가 위독해지자 6개월 만에 돌아와 체포됐다. ‘바나나 공화국’이란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그의 ‘양배추와 왕들(Cabbages and Kings)’이 도피 시절 쓴 작품이었다.

그가 정말 횡령을 했는지는 지금도 논란거리다. 당시 은행(오스틴제일은행) 회계가 무척 허술했던 데다 그가 유죄 판정을 받은 3건 중 1건은 은행을 그만둔 뒤 일어난 일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의 무죄를 추정하는 이들이 있다. 반면 잡지가 자금난을 겪던 중에도 그는 ‘샌 앤토니오 판’을 발간하는 등 사세를 확장했고, 도피까지 한 점 등이 유죄의 증거라는 주장도 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서부터 재임 마지막 해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사면’하면서 오 헨리의 ’추수감사절의 두 신사’를 인용했던 버락 오바마까지 미국 역대 대통령들이 그의 팬이었고, 여러 차례 사후 사면 청원이 있었지만, 그는 공식적으로 사면받지 못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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