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정 선행 학습 코스인 AP
신대륙 발견ㆍ식민지 건설 위주
대입위원회, 반발 커지자 물러서
발터세뮐러가 16세기에 제작한 세계 지도. 아메리카 대륙이 처음으로 지도상에 표현됐다. 미 의회 도서관 소장.

미국의 대학 학점 선이수제인 AP(Advanced Placement)의 세계사 과목이 유럽 중심주의 논란에 휩싸였다. 1만년의 인류 역사 전 과정을 다뤘던 이 과목이 최근 유럽이 세계 무대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시기에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입시위원회(College Board)는 2019~20학년부터 AP 세계사를 서기(西紀) 1450년 이후부터 다루겠다는 방침을 지난 5월 공고했다. 기존 AP 세계사가 1만년의 역사를 다루다 보니 내용이 너무 방대해 학생들이 1년간 이를 소화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교과 개편에 나선 것이다. 재커리 골드버그 대변인은 “교사와 학생들이 한 코스에 너무 많은 내용이 다뤄지고 있다는 불만을 제기해왔다”며 “해당 교사 10중 8명은 1년 안에 교과 과정을 다 끝낼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고 개편 배경을 설명했다. 지난해 AP 세계사 시험으로 출제된 한 논술 문제의 경우 학생 70%가 1점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위원회 측은 근대사에 집중하면서 서기 1450년 이전 시기는 ‘전(前) AP 세계사와 지리’라는 별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다루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서기 1450년 이후는 유럽이 신대륙 발견에 나서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팽창을 본격화하던 때여서 교과 개편이 유럽 중심주의적 시각에 따른 것이란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다. 뉴저지의 한 고등학생은 위원회 방침에 반발하는 온라인 서명 운동에 나섰고 미국역사협회도 우려 서한을 보내는 등 논란이 확산됐다. 지난달 AP 프로그램 책임자인 트레버 패커가 참여한 한 포럼에선 한 교사가 “흑인과 동양 학생들에게 너희들 역사는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하는 것과 같다”며 “그들의 역사는 노예나 식민지에서 출발한 게 아니다”고 항의했다고 CNN은 전했다.

이 같은 논란에 따라 위원회는 18일 AP 세계사의 시작 시점을 서기 1,200년으로 수정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근대 시기의 토양인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 문명에 대한 내용도 포함하겠다는 것이다. 위원회는 서기 1,200년 이전 시기를 다루는 새 코스 명칭도 ‘AP 세계사 : 고대편’으로 변경했다.

위원회가 반발 여론을 일부 수용한 것이지만 논란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위원회 결정은 교육 편의를 위해 세계사를 두 갈래로 나눈 것이지만 일선 학교들이 현실적으로 두 코스를 모두 가르칠 여건을 갖추지 못 했고 학생들 역시 두 과정을 모두 수강할 가능성이 낮아 결국 고등학생들이 고대ㆍ중세는 제외하고 유럽 중심의 근대사만 배우게 될 것이란 지적이 여전하다. 특히 미국 내에서 인종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조치로 세계사 수업을 통해 인종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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