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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한여름 밤의 꿈

입력
2018.07.22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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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누워 있는데 문득 여름휴가를 갈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는 중이었다. 선풍기를 틀까, 풀 먹인 듯 사각사각한 감촉의 홑이불을 마련할까, 그런데 모기가 물면 왜 부어오르고 근지러운 걸까, 방에 한 번 들어온 모기는 여름 내내 나와 같은 피를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런저런 잡념을 이어가던 끝에 불쑥 솟아오른 생각이다. 며칠 전 정수기 점검을 하러 오신 분이 인사말처럼 여름휴가는 언제 갈 계획이냐고 물었다. 평생 출퇴근하며 일한 적이 없었기에 휴가를 쓴다거나 휴가를 간다는 말을 입에 올릴 기회가 없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슬그머니 당황했다. 여름휴가라니. 물론 어쩌다가 시간과 돈이 나에게 너그러워지면 마음 맞는 사람들과 종종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래도 여행과 휴가는 다를뿐더러, 그런 여행조차 여름에는 가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여름휴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책장 맨 아래 칸에 먼지 뒤집어쓴 채 방치되어 있는 옛 앨범을 새삼스레 꺼내어 펼쳐보는 기분이 되었다.

처음 바닷가에 갔던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모기장이 쳐진 민박집 평상 위에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 캄캄한 어둠 속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다의 첫인상은 경계 없이 펼쳐져 있는 푸른 물이나 하얗게 부서지는 물거품의 장면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보다는 어둠 속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결코 끊기는 법 없을 심장 고동처럼 힘차고 부드러운 소리로 각인되어 있다. 해가 지고 밤이 되는 것을 늘 겁내던 아이인 나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바다의 소리가 편안하고 좋았다. 마음속에 뿌리 없이 떠다니던 두려움을 밀어내는 것 같았다.

해마다 그랬던 건 아니지만, 아버지는 올망졸망한 딸들을 데리고 계곡이나 바닷가로 여름휴가를 가곤 했다. 여섯이나 되는 딸들을 모두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가위 바위 보를 했고, 운 나쁜 가위나 보나 바위를 낸 몇몇은 집에 남았다. 그러니까 아버지 차를 타고 휴가를 따라가게 되는 일은 복권에 당첨되는 행운 같은 것이었다. 바닷가의 민박집 평상에 앉아 수박을 잘라 나눠 먹거나, 계곡의 넓은 바위에 돗자리를 깔고 둘러 앉아 닭백숙을 끓여 먹던 부산스러움. 어머니가 참외를 깎는 동안 누구는 속을 긁어달라고 하고 누구는 속까지 먹겠다고 조르던 번거로움. 운 좋은 아이로 선택되어 설렜으나 결국 기대에 못 미친 심심한 며칠을 보내고 돌아올 때의 피로감. 나에게 여름휴가는 그런 기억들의 모음이다.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모기를 쫓으려 불을 켜는 순간, 기억은 어린 시절을 마감하는 표지판처럼 서 있는 어느 여름날의 풍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새벽마다 초인종을 눌러대는 채권자들 때문에 잠을 설칠 무렵, 커다란 방 한 칸에 온 식구가 모여 생활하던 무렵,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곧 팔아버려야 할 낡은 자동차에 식구들을 태우고 청평유원지로 향했다. 한때 김밥이며 통닭 같은 것을 싸 들고 놀러 다니던 시절을 되살리고 싶었던 걸까. 막막한 미래를 잊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80년대 초반 즈음의 청평은 더러운 개천이 흐르는 버려진 곳으로 변해 있었다. 식구들은 난감했으나 애써 즐거운 척 하면서 각다귀 떼가 날아다니는 물가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부서진 낡은 보트 근처에 서서 어색하게 사진을 찍기도 했다. 다시 불을 끄고 누워 잠을 청하면서 생각에 잠긴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날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꿈속에서라도 갈 수 있는 여름휴가 하루를 고르라면, 바로 그날로 돌아가고 싶다. 갈 수만 있다면 이제는 정말로 즐거워할 수 있다. 그리고 이후로도 줄곧 행복할 것 같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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