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한국일보] 미국 뉴욕 9∙11 추모 기념관. 뉴욕=최문선 기자

지난주 미국 뉴욕 9∙11 추모 기념관에서 눈물, 콧물을 잔뜩 흘렸다. 희생자들의 마지막 말이 나를 울렸다. 세계무역센터에서, UA93편 비행기에서 죽음을 직감한 사람들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모두 같은 말이었다. 사랑해, 사랑하고 사랑해, 엄청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이 그렇게 눈을 찌르는 말인 줄 몰랐다.

몇 분 뒤면 내가 이 세상에 없을 텐데도, 그들은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했다. 어떻게든 그 말만은 남기고 싶어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아내와 아이들에게 전화해 주세요. 내가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꼭 말해주세요. 그러겠다고 약속해 주세요.”(위성전화 교환원에게) “나 죽는 거죠?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였다고 말해 주세요.”(911 요원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그런 말이다. 가슴 치는 후회의 말, 한 번만 말할 수 있다면 전부를 걸 수 있는 말, 가닿지 못할까 봐 손끝이 떨리는 말, 영원히 마음에 품고 가는 말…

그 말들은 우리 가까이에도 있다. 귀 기울이지 않고 살 뿐. 세월호 4주기에 나온 ‘그리운 너에게’는 단원고 학생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쓴 육필 편지 110통을 묶은 책이다. 편지들은 예외 없이 사랑해로 시작해 사랑해로 끝난다. “아빠가 말로 못했던 그 말, 그 말, 그 말은 사랑한다, 아들 범수야”, “사랑한다 세영아, 너무나도 사랑한다, 미치도록 사랑한다…” 세월호 사람들이 유별나서가 아니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때도 그랬다. 희생자들의 마지막 문자메시지는 온통 사랑해였다. “엄마, 난 엄마 없이 못살아. 그래서 먼저 가나 봐. 사랑해”, “아침에 화내고 나와서 미안해. 진심 아니었어. 자기야 사랑해 영원히…”

한국 사람에게 유난히 어려운 말, 어려워서 더 귀한 말, 사랑해. 그 말을 누군가는 돈으로 샀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말이다. “새빨간 장미만큼 회장님을 사랑해~ 가슴이 터질 듯한 이 마음 아는지~” 아시아나항공 입사 1년차 스튜어디스 교육생들이 회장님께 바쳤다는 노래다. 회장님은 흡족해서 가슴이 터졌을까. 나는 복장이 터졌다. 누군가의 가슴에선 피눈물이 터졌을 거다. 영혼을, 자존심을 함께 바쳐야 했을 테니까.

지난달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아시아나항공 경영진 규탄 문화제. 고영권 기자

정직원이 될 기회, 든든한 4대 보험, 꼬박꼬박 들어 올 월급… 회장님의 사람들은 그것들을 교육생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사랑한다는 말과 바꾸라고 했다. 말로는 모자라니, 행동으로 사랑을 보이라고 했다. 회장님께 안겨라, 눈물 흘려라, 같이 사진 찍자고 졸라라… 아시아나항공 직원들은 스스로를 기쁨조라 불렀다. 독재자를 기쁘게 하지 못하는 기쁨조는 목숨을 내놔야 한다. 자본가의 기쁨조는 생계를 포기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판 그들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이 시대 사랑의 수난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사랑했다는 말에 숨으려 하는 사람, 안희정씨가 있다. 그는 비서 성폭행을 깨끗이 인정하는 듯 하더니, 역시나 말을 바꾸었다. 그 순간엔 사랑이었으므로 성폭행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게 안씨 변호인단이 세운 전략인가 보다. 우리 서로 사랑하는 줄 알았지, 그래서 내가 너를 좀 함부로 대했지, 너도 나를 사랑했지, 그러니까 저항하지 않았지, 바로 신고도 하지 않았지… 지긋지긋한 레퍼토리다. 비서를 ‘사랑에 눈 멀어 뵈는 게 없는 어린 여자’로 몰아 가는 언론 보도는 참담하다. 안씨가 위력으로 비서의 성적 자유를 침해했는지, 오직 그게 핵심이다. 사랑을 변명 삼으면 어쨌거나 순정해 보일 거라 안씨가 기대한다면, 착각이다. 나라를 열렬히 사랑해 나라와 결혼했다는 전직 대통령은 그 사랑이 너무도 어리석었던 죄로 감옥에 갔다.

다시 말하건대, 사랑한다는 말은 고귀하다.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나는 오늘부터 자주, 열심히, 뜨겁게 말할 생각이다. 부디 내 사랑을 모독하지 말라.

최문선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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