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안정복과 이기양의 일합

#
아들이 신자였던 이기양
안정복의 천주학 비판이
자기 집안을 위태롭게 할까봐
32세나 연상인 안정복에 항의
#
공격받은 안정복이 움츠러들자
남인 내부의 서학 공격도 주춤
채제공은 젊은층 눈치 보고
다산은 천주학 재건을 암중모색
번암 채제공의 초상. 사도세자의 스승이자, 정조의 무거운 신임을 받았던 남인의 영수였다. 그런 채제공마저 천주교 논쟁에 대해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갑작스런 항의 방문

1785년 10월 10일, 문의현감으로 있던 이기양(李基讓ㆍ1744~1802)이 천주학에 쏠린 남인 젊은 층의 움직임에 지속적으로 제동을 걸어오던 안정복을 불쑥 찾아왔다. 앞서 소개한 1784년 12월 14일 안정복이 권철신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에서, 이기양이 문의에서 보냈다는 사적인 한글 편지에 대해 안정복이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이 사단이었다.

집으로 들어서는 이기양의 서슬이 보통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기양은 자신보다 32살이나 연장인 안정복에게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

“선생님! 편지 속에 ‘문의언찰(文義諺札)’이란 네 글자는 제 어머님의 편지인데, 그걸 어째서 남에게 말씀하십니까?”

머쓱해진 안정복이 “우리가 남인가? 일가나 한 가진데 그게 무슨 잘못인가?”하자, 이기양이 정색을 하고 쏘아 붙였다. “그러시면 안 되지요. 그 한글 편지를 손님이 올 때마다 보여준 것은 또 어째서입니까?” 안정복이 바깥사람에게 보인 적이 없다고 하자, 이기양이 말허리를 자르며 또 말했다. “어째 이런 법이 있습니까?” 궁지에 몰린 안정복이 대답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노망이 들어 그런 것인데, 어찌 이다지 심하게 말하는가?”

이기양은 물러서지 않고 매섭게 쏘아 붙였다. “절대로 이럴 수는 없습니다. 지난 번 권철신에게 보낸 편지를 두고 사람들이 모두 재앙을 만들려는 화심(禍心)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디다.” 천주학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안정복의 행보가 장차 남인 내부에 큰 재앙을 불러들이려는 의도된 행동이라고 찔러 말한 것이다.

말이 아주 살벌했다. 놀란 안정복이 대답했다. “금번 서학(西學)이 어찌 사군자가 배울만한 것이란 말인가? 내가 크게 염려가 되어 경계의 말을 했던 것인데, 이것이 어찌 화심으로 그런 것이겠는가? 성격이 급해 곧이곧대로 말하다 보니 이런 뜻밖의 일이 생긴 것일세.” 말투에 기세가 급격히 꺾였다. 이기양이 한 번 더 안정복을 몰아세웠다. “평소 어르신의 꼼꼼하심은 남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허심탄회하게 터놓고 말씀하셨다니요?” 말실수가 아니라, 모두 계산된 행보가 아니냐는 추궁이었다. ‘벽위편’ 중 ‘안순암(安順庵) 을사일기’ 속에 나온다.

세상 길이 참 어렵다

74세의 안정복이 제자 뻘인 42세의 이기양에게 느닷없는 봉변을 당했다는 소문이 남인들 사이에 금세 쫙 퍼졌다. 이틀 뒤인 10월 12일, 씁쓸해진 안정복은 ‘행로난(行路難)’이란 시를 지었다. 긴 시라 일부만 싣는다.

눈앞에 바른 길이 평탄하게 열렸건만

어이해 서로 끌어 굽은 길을 뚫고 가나.

그 누가 곧은 마음 옛 도라 하였던고

아첨의 방편됨을 이제야 알겠도다.

영장산의 늙은이가 애초에 분별없어

망령되이 바로잡아 충고를 하렸더니,

도리어 내 성품이 너무 꼼꼼하다면서

교묘히 화심(禍心) 얽어 깊이 숨겨 놓았다네.

目前正路坦蕩蕩(목전정로탄탕탕)

胡乃相携曲徑穿(호내상휴곡경천)

誰言直諒是古道(수언직량시고도)

乃知諛侫爲方便(내지유녕위방편)

靈山老叟本疎狂(영산노수본소광)

妄許忠告相規匡(방허충고상규광)

反謂翁性太縝密(반위옹성태진밀)

巧織禍心深包藏(교직화심심포장)

앞서의 대화를 다시 시로 적은 것이었다. 당당한 정도를 버리고 굽어 도는 뒷길로 서로를 이끄는 현실을 통탄하고, 진심의 충고를 흉계로 내모는 후학에 대한 분노를 담았다. 시 제목 ‘행로난’는 세상 살아가는 길이 참 험난하다는 의미다.

변명하지 않겠다

안정복은 그것만으로는 분을 삭힐 수가 없었다. 같은 날 다시 벽에다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경문(自警文)’을 따로 지어 붙이기까지 했다.

붉은 마음 화심으로 지목하다니

내 어이 이를 하여 덕 바랐으리.

도리어 원망으로 되갚아오니

그대 또한 어질지 못한 것일세.

심판하심 하늘에 달려 있나니

모름지기 그 누굴 허물하겠나.

하나하나 변명할 방법이 없어

다만 그저 혼자서 수양할 밖에.

赤心目以禍心(적심목이화심)

余忍爲此德報(여인위차덕보)

反以怨報(반이원보)

君亦不仁(군역불인)

審判有天(심판유천)

不須他咎(불수타구)

分䟽無地(분소무지)

但當自修(단당자수)

정성스런 붉은 마음(赤心)을 화심이라 하고, 덕을 베풀었는데 원망만 돌아왔다. 심판은 하늘이 한다. 굳이 더 변명하지 않겠다. 나는 다만 내 길을 닦겠다.

이기양은 안정복에게 어째서 이렇게 무례하게 대들었을까? 그의 아들 이총억이 1785년 3월 의금부에 적발된 명례방 모임에 참석했던 천주교 신자였고, 이총억은 권일신과 함께 형조판서를 찾아가 성상을 돌려달라고 했던 네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안정복의 공개적인 행보는 이기양의 집안을 일거에 위험에 빠뜨릴 덫이 될 수 있었다.

이기양의 강력한 항의로 안정복이 움츠러들면서 남인 내부에서 서학을 공격하는 분위기는 일단 진정되었다. 이후 천주학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차츰 시들해졌다. 이때 다산은 부친의 감시 아래 과거 시험 준비에 몰입하는 한편, 천주학 재건을 위한 암중모색에 돌입하였다.

입조심이란 세 글자를 써 붙여두고

이듬해인 1786년 윤 7월 16일에 9개월 이상 침묵하던 안정복이 채제공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안정복이 천주교를 배척하는 것을 보니 노익장이 따로 없더라고 했다는 채제공의 말과, 임금이 안정복에게 내려준 ‘불쇠헌(不衰軒)’의 당호로 기문을 지었으니 사람을 보내 찾아가라 했다는 전언을 듣고 보낸 편지였다.

정조가 안정복에게 내린 당호 '불쇠헌'에 맞춰 채제공은 '불쇠헌기'란 글을 지었다. 천주교에 쏠리는 젊은 남인들을 질타한 안정복에 대한 칭송이 들어 있다.

안정복의 어조는 한결 같았다. “근래 우리 당의 젊은이로 평소에 재기가 있다고 자부하던 자들이 신학(新學)으로 많이 돌아, 참된 도리가 여기에 있다 하며 휩쓸리듯 좇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그 뒤집혀 빠져든 형상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대략 간곡하게 경계의 가르침을 폈더니, 붉은 마음에서 나온 것을 도리어 화심이라 말하며, 감히 끊을 수 없는 사이이지만 감히 끊겠다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용감하긴 하오만은 또한 하나의 변고인 셈입니다. 원래 우리 남인이 복이 박한데 한 집끼리의 싸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처럼 당론이 횡행하는 때에 어찌 곁에서 틈을 타서 돌을 던지는 자가 없을 줄 알겠소이까? 그 형세가 반드시 망한 뒤에야 그칠 것입니다. 지금은 그저 내버려두고, 벼루 뚜껑에 ‘마두견(磨兜堅)’ 즉 입조심이란 세 글자를 써서 스스로를 경계할 뿐이라오.”

글 속에 단단히 맺힌 것이 있다. 편지 끝에 안정복은 채제공이 자신을 위해 지었다는 ‘불쇠헌기(不衰軒記)’ 중에 천주교를 배척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지라, 젊은 층들에게 공연한 시비를 당하게 될까 염려해 글을 보내지 못한다는 말이 들리는데, 우리 두 사람이 나서서 천주학을 물리치지 않으면 누가 그 일을 하겠느냐며 함께 공동의 보조를 취하자고 촉구했다.

미심쩍은 채제공의 태도

이로 보아 이기양의 항의 방문이 여파가 상당했고, 남인 청년층에서 당시 안정복의 행동에 대해 반감을 품은 그룹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안정복은 이 일로 노망든 늙은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한편 채제공이 지은 ‘불쇠헌기’ 안에 안정복이 말한 천주학에 대한 비판 내용이 실제로 들어 있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얼마 뒤 공이 연소한 무리들의 구설에 크게 곤경을 치렀다는 말을 들었다. 떠들썩하니 노망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대개 서양의 이마두(마테오 리치)의 무리가 지은 책이 근자에 처음으로 우리나라로 흘러 들어왔는데, 나이 젊고 배움에 뜻을 둔 사람들이 묵은 얘기에 싫증을 내며 신기한 것을 좋아해 휩쓸리듯 그 학문을 버리고 이것을 좇는다고 했다. 부모를 천주에 견주는 것쯤이야 도외시한다 해도, 임금은 딸린 일가붙이가 없어야만 세울 수가 있다거나, 음양의 두 기운으로는 만물을 만들 수 없다는 얘기, 천당과 지옥이 틀림없이 진짜로 있다는 말이며, 태극도(太極圖)란 짝을 맞춰 한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고, 천주가 참으로 예수를 내려 보냈다고 하는 말 같은 것은 아득하고 허무맹랑해서 그 단서가 수도 없었다.”

글 끝에는 안정복에 대한 이런 찬양도 들어 있었다. “공은 궁벽한 산 속의 깊은 밤에 남몰래 근심하고 길이 탄식하며 혈혈단신으로 일어나, 막 움터 나오는 기세에 대해 말을 엄히 하여 이를 배척하고, 혹 따뜻한 말로 일깨우기도 했다. 우리 유학의 도를 지킬 수만 있다면 비난과 조롱도 걱정하지 않았고, 삿된 주장을 막을 수만 있다면 환난과 해로움이 있어도 돌아보지 않았다.”

채제공의 이 같은 말이 안정복에게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을 주었을 테지만, 안정복은 채제공의 태도에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채제공은 ‘불쇠헌기’를 써놓고도 안정복에게는 보내지 않으면서 그들 남인 젊은 층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인기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