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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정적(靜寂)] 축구(蹴球)

입력
2018.07.16 13:53
수정
2018.07.16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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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 2018년 FIFA 러시아 월드컵이 마침내 끝났다. 월드컵 경기들은 나를 지난 한 달 동안 TV앞으로 불러들였다. 전 세계인들은 자발적으로 TV 앞에 눈과 귀를 고정시켰다. 러시아와 한국의 시간 차로 경기는 대개 밤 12시 이후에 진행되었다. 나는 경기들과 함께 새벽을 맞았다. 이 경기들은 나의 종교인 ‘달리기’를 방해하였다. 그러나 나는 한밤중에 TV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10억명 이상이 크로아티아와 프랑스 결정전을 관람하였다. 월드컵 경기는 오늘날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세계 종교’다. 무엇이 월드컵 축구를 매력적으로 만드는가?

첫 번째, 다양성(多樣性)이다. 나는 단일민족신화나 남북, 좌우, 빈부, 남녀와 같은 편 가르기 이념에 익숙하다. 그러나 월드컵은 낯설다. 다양한 인종과 국가의 선수들의 얼굴과 움직임이 TV화면에 클로즈업되면서, 나는 그들의 ‘다름’을 확인하고 인정한다. 인류는 다름을 열등으로 치부하여, 전쟁과 학살을 일삼아왔다. 우리는 우연히 자신이 태어난 사회가 교육시킨 이데올로기를 수많은 이념 중 하나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옳은 것’으로 착각한다. 우리 각자가 애지중지하는 이념은 사실 무식(無識)이다. 교육(敎育)은 그 무식을 해체하는 작업이다. 고대 히브리어에 ‘다름’을 의미하는 단어 ‘코데쉬(qodesh)’는 ‘성스러움’이란 의미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성스러움이란 다름에 대한 승복이다. 월드컵 경기 내내 관찰한 다양한 인종들, 문화들, 종교들은 나의 세계관을 조금씩 확장하는 도구였다.

두 번째, 공평(公平)이다. 누구나 월드컵 축구선수가 될 수 있다. 축구는 다른 스포츠처럼, 특별한 신체조건을 요구하지 않는다. 선수는 자신에게 온 공을 유연하고 신속하고 정확하게 다루면 된다. 그런 선수만이 다른 선수에게 신속하고 정확하게 패스할 수 있다. 모든 선수는 어릴 때부터 ‘공정(公正)한 경쟁(競爭)’을 통해 살아남은 자들이다. ‘경쟁’만이 인간을 과거의 진부한 상태에서 미래의 참신한 상태로 전환시킨다. 고대 그리스어로 ‘경쟁’이란 의미를 지닌 ‘아곤(agon)’은 두 가지 경쟁을 담고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과의 경쟁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올림픽경기와 비극경연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의 ‘공정한 경쟁’을 찬양하였다. 수많은 관객이 1등을 가린다. 그리스인 누구나 자신의 배경과는 상관없이 1등상을 타기 위해 대중 앞에서 경쟁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과 경쟁하지만, 위대한 선수들은 자신과 경쟁한다. 영어에서는 자신과의 경쟁을 나타내는 단어는 ‘애거니(agony)’다. 흔히 ‘고뇌(苦惱)’라 번역된다. 그 경쟁은 공정해야만 한다. 만일 한 선수가 골을 넣기 위해, 다른 팀 수비들 보다 안으로 들어가 기다린다면,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반칙이다. 축구경기에서는 이 반칙을 ‘오프사이드 반칙’이라고 부른다.

세 번째, 승복(承服)이다. 경기에 임하는 모든 선수가 공평하게 경쟁하기 위해 이들이 무조건 승복해야 하는 주심과 부심들이 있다. 그들은 공정한 경쟁에 치명적인 반칙을 선별한다. 이번 월드컵에는 더 공정한 판결을 위해, 모든 순간을 느린 동작으로 다시 볼 수 있는 심판관들을 도입했다. 바로 ‘비디오 도움을 받는 심판관들(VAR)’이다. 이들은 비디오 녹화를 통해 경기장 안에서 주심이나 부심도 감지할 수 없는 세밀한 부분까지 잡아낸다. 주심의 판결은 한쪽 팀엔 유리하고 다른 팀엔 불리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 그도 인간이다. 그러나 심판들의 판결이 내려지면, 모든 선수는 불만이 있더라도 승복해야 한다. 만일 선수가 주심의 판결에 불복하면, 그는 즉시 퇴장당한다. 축구를 비롯한 모든 경기에서 심판관을 두는 이유는, 이들의 판단과 승복 없이 어떤 경기 진행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협동(協同)이다. 축구는 11명이 1명이 되어 협동을 연습하는 스포츠다. 선수는 동료 선수들과 끊임없이 소통한다. 그들은 오랜 연습을 통해, 동료 선수가 어디로 공을 패스할지 감으로 안다. 우리는 축구(蹴球)를 ‘발로 공을 차는 (운동)’쯤으로 알고 있지만 축구의 종주국인 영국에서는 축구를 ‘사커(soccer)’라고 부른다. ‘사커’는 라틴어로 ‘친구: 동반자’란 의미의 명사 ‘소시우스(socius)’와 ‘따라가다’라는 의미를 지닌 접두어 ‘아드(ad)’가 결합된 합성어다. 축구는 친구를 만드는 연습이며, 협동을 훈련하는 운동이다. 각자가 자신에서 벗어나 무아를 수련하고 친구를 포함한 더 큰 공동체를 만드는 연습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속한 국가를 위해 헌신한다. 인간은 개인이 아니라 개인이 속한 도시와 국가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파리 에펠탑 앞 샹드 마르고 공원에 모인 프랑스인들과 자그레브 광장 크로아티아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선수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축구는 자신이 속한 조국을 위해 애국심을 고취하는 의례다. 전쟁의 참화에서 부활하여 결승전에 오른 크로아티아가 이기기를 바랐다. 4년 후 월드컵이 벌써 그립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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