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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제도가 그렇듯 처음엔 대단한 변화를 끌어낼 거란 기대를 받지만 막상 도입되면 기대치를 밑돌 때가 많다. 정책담당자들이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해도 제도란 건 항상 빈틈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런 빈틈을 노리는 이들 또한 많아서 제도가 애초 기대대로 굴러가는 게 쉽지 않은 탓이다. 가장 최악은 제도를 보완한단 이유로 이런저런 예외를 만들면서 제도 자체를 누더기로 만드는 경우다. 지난해 말 국민권익위가 부패 척결을 위해 만든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을 법 시행 1년도 안돼 손질(선물금액 상향)해 논란을 샀다. 그런데 지난달엔 예외 범위를 더 넓히는 내용의 개정안이 국회에 재발의 됐다. 내가 기자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일이 숱해서다.

지난 1일부터 큰 기대 속에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됐다. 당장 제도의 효과를 체감하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출입하는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은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을 1년 유예 받아 당장 변화가 없다. 일부 대형은행들은 직원의 빠른 퇴근을 돕겠다며 오후 6시가 되면 아예 컴퓨터가 꺼지는 피씨오프제(PC-OFF)를 도입해 선진 근로문화를 갖췄다 자랑하지만, 정작 직원들은 시큰둥하다. ‘맡은 일은 끝내고 가자’는 분위기가 팽배한 데, 컴퓨터 꺼졌다고 짐 싸는 ‘용자’가 있겠냐는 거다. 컴퓨터가 꺼지기 전 알아서 추가 근로를 신청하는 게 센스다. 많은 이들이 공무원을 철밥통이라며 깎아 내리지만 내가 출입하는 금융위원회는 밤 8시에 전화를 걸어도 당연하단 듯 받는다. 공무원법을 적용 받는 공무원들은 주 52시간 제도의 예외다.

직원수가 300인 미만인 금융협회, 중소기업 직원들은 피씨오프제와 같은 제도라도 갖춘 게 어디냐며 부러워한다. 이들에게 주 52시간 제도는 2020년에나 가능하다. 직원수 300인 이상이면서 유예 업종에 해당되지 않는 일반 대기업에 다니는 직원들이 얼핏 ‘위너’인 것 같지만 이들이라고 마냥 달갑진 않다. 해야 할 일은 그대론데 퇴근만 빨라져서 집이나 인근 카페로 자릴 옮겨 일을 하는 처지다. 이런 현실을 바로잡아야 할 회사(또는 상사)는 은근히 이를 묵인 또는 부추긴다.

9년 차 기자의 감으로 앞으로 주 52시간 제도를 회피하기 위한 꼼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업그레이드를 거듭할 게 뻔하다. 여기에 정부(또는 국회)가 주 52시간 제도가 업무 효율성을 해친단 이유로 제도 수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조금씩 반영하면. 그 이후는 우리가 익히 봐 온 그런 풍경이 펼쳐진다.

난 정부가 기업에 바뀐 제도를 지키라고 닦달한다고만 해서 풀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근본적으론 정부와 국회가 개인의 휴식보다 ‘일’을 우선으로 여기는 지금의 사회 분위기를 바꾸고, 나아가 퇴근 후 ‘여가시간’은 기본권이란 인식이 사회에 뿌리 내릴 수 있는 그런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퇴근 후 뭘 하든 그건 개인의 자유지만, 정시 퇴근을 눈치 보지 않고 퇴근 후면 어김없이 울리는 업무 카톡을 당연히 비정상이라 여기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건 정부와 국회 몫이어서다. 이런 토대 위에서야 제도의 진보를 기대할 수 있고, 제도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도 바뀐 시대를 체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토대를 세울 제도는 이미 갖춰져 있다. 정부는 국민의 ‘휴식 있는 삶’을 기본권으로 보장하기 위해 7년 논의 끝에 2015년 ‘국민여가활성화기본법’을 만들었다. 그런데 휴식을 죄악시하는 사회 분위기 탓에 후속 논의가 지연되면서 법에 근거한 기본계획은 3년이 지난 지난달에야 만들어졌다. 상황이 이럴진대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가 미는 정책이 국회서 먹힐 리 없다. 문체부가 여가 관련 사업을 위해 국회서 얻은 예산은 통틀어 1억 원이 전부다. 1억 원으로 여가친화기업을 뽑아 인증하는 사업만 한다. 국회는 국민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국민의 여가를 위해 내놓은 법안은 제로(0)에 가깝다.

주 52시간 시대, ‘여가’란 단어에서 여전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건 제도에 빈틈이 많아서인가, 사회의 인식이 제도에 미치지 못해서인가. 둘 다이지 싶다.

김동욱 경제부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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