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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 시신으로 발견된 건축사… 미제사건 남은 이유는

입력
2018.07.15 14:00
수정
2018.07.15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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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한 잔, 두 잔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달도 기울었다. 1994년 4월 21일 밤 11시 30분, 일본 최대 번화가인 도쿄 신주쿠(新宿)역 앞. 1급 건축사 카와무라 세이치(川村誠一ㆍ35)는 옛 직장 동료 2명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의 현 직장 승진을 축하하기 위해 과거 동료들이 열어준 파티였다. 카와무라는 JR 중앙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자택이 있는 기치조지(吉祥寺)역까진 40분. 자리에 앉아 눈 좀 붙이면 금세였다.

승진파티는 마지막 술자리가 됐다. 카와무라가 공원 청소부 A씨에 의해 끔찍한 주검으로 발견된 건 실종 이틀째 되던 1994년 4월 23일 오전 11시쯤 기치조지역 앞 이노가시라(井の頭) 공원의 쓰레기통 안. 무려 27조각으로 토막 나 8개의 쓰레기통 안에 뿔뿔이 버려져 있었다. 수습한 시신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머리와 몸통 대부분이 없었다. 시신은 22㎝ 간격으로 절단돼 비닐 봉투로 이중 포장돼 있었다. 시신이 부패하는 냄새를 막으려는 의도였다.

지문까지 없어진 시신… 결정적 증언 확보했지만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몇 가지 특징에 주목했다. 먼저 일정하게 절단된 시신의 간격. 왜 하필22㎝였을까. 쓰레기통 입구 크기와 관련 있어 보였다. 가로 30㎝, 세로 20㎝. 봉투 두께를 감안하면 입구 크기와 딱 맞아떨어졌다. 범인은 처음부터 시신을 이노가시라 공원에 유기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시신 손발엔 지문이 없었다. 혈액도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범인이 강제로 없앤 것으로 보였다. 신원은 DNA 검사로 확인됐다. 카와무라의 부인이 재빨리 실종신고를 한 게 신원확인 기간을 앞당겼다. 경찰은 범인이 피해자와 가까운 사이일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시신이 누군지 밝혀지는 순간, 용의선상에 오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신원 은폐에 사활을 건 것이라 추정했다.

물론 공공장소에 사체를 유기하는 행위는 모순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각 등 시신을 더 은밀하게 처리할 방법도 있었을 터. 그러나 출처를 일일이 확인할 수 없는 ‘익명’의 쓰레기들에 시신을 유기시켜 완전범죄를 노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경찰은 면식범 소행에 무게를 뒀다. 카와무라의 친인척들이 주요 수사 대상에 올랐다. 강도 높은 수사가 진행됐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카와무라가 평소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금전 관계도 깨끗했다. 아무리 이 잡듯 뒤져봐도 카와무라의 죽음엔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수사가 점점 공회전을 거듭할 즈음이었다. 1994년 10월 21일. 한 지역 신문이 특종을 터뜨렸다. 취재 도중, 시신이 발견된 편의점 인근 점장에게서 시신 발견 전날 편의점을 찾은 수상한 남성 두 명에 대한 증언을 확보한 것.

“남자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30대, 다른 한 명은 50대 전후로 보였어요. 두 사람은 따로 편의점에 왔어요.오자마자 쓰레기 봉투가 있는 선반으로 왔어요.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어요. 한 명이 계산대에서 계산하고 있는 동안, 바깥에 있는 한 명은 주변을 살피는 것 같았어요.”

경찰은 비슷한 시기, 탐문 수사를 통해 또 다른 목격자로부터 중요 증언을 확보했다.시신이 발견된 당일 새벽, 흰색 비닐 봉투를 들고 다니는 수상한 남성 두 명을 목격했다는 것. 목격자에 따르면, 남성들은 30대 안팎으로 보였고 한 명은 감색 정장, 다른 한 명은 검정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인상착의도 앞서 점장이 언급한 남성들과 비슷했다.

경찰은 목격담을 토대로 몽타주를 제작, 도쿄 시내 전역에 배포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제보는 쏟아졌지만, 모두 조금씩 부족했다. 사건 1년 뒤인 1995년 3월 신흥종교 ‘옴진리교’의 도쿄 사린가스 테러에 묻혀 수사 동력을 잃은 영향도 있었다. 경찰은 끝내 범인을 잡는 데 실패했다.

외국 정보원들에 의한 ‘오인 살해’?

2015년 3월, 일본의 한 온라인 매체는 흥미로운 보도를 내놨다. 카와무라가 외국 정보기관에 의해 ‘오인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매체는 이를 뒷받침할 남성 B씨의 인터뷰도 공개했다. 그는 자신이 “카와무라 대신 죽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매체에 따르면, 실제 그는 카와무라와 얼굴이 상당히닮았다. 나이는 물론, 키와 몸집까지 비슷했다. B씨 입에서 나온 얘기는영화 줄거리라 해도 좋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1994년 일본 곳곳에 새로운 형태의 노점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외국인 히피족들이 여행 경비 마련을 위해 이른바 ‘벼락치기’ 노점상을 시작한 것. 이들은 마구잡이로 장사판을 벌이는 통에 현지 노점상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B씨는 기치조지역 인근에서 노점상을 운영하는 일본인이었다.

피해는 점점 늘어만 갔다. 그러자 B씨를 비롯한 현지 상인들은 제3자를 통한 실력행사에 나섰다. 조직폭력배인 ‘야쿠자’를 끌어들여 외국인 노점상들의 가판 철거에 나선 것. 문제는 B씨 주변에서 장사하던 외국인 노점상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사실 그들의 정체는 신원을 숨긴 채 활동하던 해외 정보국 소속 비밀요원이었다. B씨가 자신의 활동을 방해하자 B씨를 없애려고 마음 먹었는데, 실수로 외모가 비슷한 카와무라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꽤 그럴듯한 이야기였지만, 어디까지나 B씨의 일방적 주장이었다.

종교단체에 의한 살해도 유력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피해자의 시신이 잔인하게 훼손되는등 조직적 소행이 의심됐기 때문이다. 특히 카와무라나 그의 부인이 앞서 언급한 ‘옴진리교’ 신자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추측만 그럴싸할 뿐, 물증이 없는 건 B씨의 주장과 마찬가지였다.결국 카와무라 살인사건은 2009년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

양원모 기자 ingodzone@hankookilbo.com

송영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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