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스토리’를 봤다. 이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재판 중 유일하게 일부나마 승소한 일이 있는 관부재판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예상되는 신파 대신 기대하지 않았던 존엄으로 뚜벅뚜벅 가는 이 영화를 보며, ‘허스토리’라는 단어의 뜻을 몇 번이고 곱씹어 보았다. 대다수 피해자가 여성이었던 사건에 여성이 뛰어들어 긴 싸움을 시작한다. 그런 그들을 또 다른 여성들이 돕는다. 재판이 무엇인가. 기록하겠다는 것이다. 증언하고, 눈에 보이는 증거로 남겨 있었던 일을 사라지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 기록을 위해 용기와 힘을 모았던 여성들 덕분에 재판의 끝에서 결국 패했을지 모르나, 우리는 잠시나마 이겼던 역사를 갖게 되었다. 그 역사를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한참을 울었다.

지난 7일에는 혜화역과 광화문 두 군데에서 여성 이슈와 관련한 시위가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2018년 여름에 여성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해한다면 길 위에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만연한 불법촬영과 편파 수사를 규탄하고 같은 범죄에 같은 처벌이 내려지는 사회를 바라면서, 내 몸에 대한 권리가 내가 아닌 국가에 있다고 명시된 법을 폐지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고 쓸 것이다. 길 위에 있는 여성들은 세상에 대해 원한을 품고, 그것을 풀어달라고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들은 분명히 분노했지만, 이는 여성을 혐오하는 사회와 여성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정부에 대한 정당한 분노다. 한 사회의 일원으로 내 육체가 누군가의 포르노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내 몸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내가 결정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일을 감정적인 단어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정부의 일은 문제를 직시하고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고 해결하는 일이다.

공교롭게도 하루가 멀다 하고 페미니스트, 여성 시위, ‘메갈’, ‘워마드’ 등의 키워드를 걸고 들려오는 소식들은 길 위에 선 여성들을 공격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나는 빨간 옷을 입은 여성들이 모이는 시위가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바로 ‘편파’에서 시작됐다. 여성들은 여성이 가해자인 불법촬영에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전의 불법촬영은 같은 기준으로 수사하지 않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워마드’ 회원의 성체 훼손에 윤리적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일베’를 비롯한 수많은 사이트에서 종교와 신성을 모독한 일은 왜 언론이 앞 다투어 보도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왜 친족폭력으로 인해 여성이 살해당하는 비율이 기이할 정도로 높은 나라에서,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남편을 살해한 여성에게만 비정상적으로 높은 형량이 부과되는가? 기계적으로 모든 혐오는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여성 일부를 여성 전체로 싸잡아 입을 막으려는 이들에게 이 까마득할 정도의 불균형은 보이지 않는지 묻고 싶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혐오 사건과 그에 대한 언론의 보도 행태, 여론의 반응은 모두 여성들이 길로 나와 시위를 하는 이유의 방증이다.

‘허스토리’에서 “부끄러워서” 싸움을 시작한 여성은 “세상은 안 바뀌어도 우리는 바뀌겠지요”라고 말한다. 싸움의 끝에 세상이 바뀌는 승리의 경험이 없다 해도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기록되는 경험을 통해서 바뀐다. 이전까지는 겨우 나 하나의 목소리로 세상이 바뀔 리 없고, 이게 우리가 사는 사회라며 체념하던 여성들이 과거의 패배의식을 부끄러워하며,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길 위로 나왔다. 그 목소리가 커지고, 크고 작은 응답들이 이어지고 있다. 바뀐 우리가 바꾸고 있는 세상은 기록되어야만 한다. 나중에 누군가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고 울게 되는 일이 없도록, 여기서 여성들이 싸우고 있는 이야기를 써 나가야 한다. ‘허스토리’의 뜻은 ‘히스토리’와 같다. 역사.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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