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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 쪽방촌에는 명화가 있다

입력
2018.07.1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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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 어때?”

명화를 소개하는 작가인 지인이 보내온 몇 장의 그림. 으레 그녀가 소개하는 명화겠거니 하고 답했다.

“나쁘진 않은데요? 유명 작가들 화풍이 섞여 있는 듯도 한데···썩 명작은 아니네요. 그런데 누가 그린 거예요?” “쪽방촌에 사는 할아버지.”

종종 봉사활동을 가던 쪽방촌에서, 그녀는 뜻밖의 미술관을 발견했다고 한다. “나는 핸드폰 요금이 0원이야. 아무도 전화를 하지 않으니까.”라고 말하는 쓸쓸한 뒷모습. 발길 없는 좁고 적막한 공간을 채운 건 수백 점의 그림이었다.

쪽방촌 노인, 홍구현 할아버지는 늘 혼자였다. 아버지가 재혼한 뒤 두 명의 이복동생들과 늘 비교당하며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 그나마 마음을 의지했던 동생도 한 명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다른 한 명은 30년 전에 연락이 끊겨 생사도 알 길이 없단다. 지인 소개로 해외 이주여성과 결혼도 했으나 몇 달 지나기도 전에 통장을 모두 가지고 잠적해 버렸다.

할아버지의 과거를 들으면서도, 마음속엔 ‘하지만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면 자신의 한 몸은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걸 눈치 챈 듯, 그녀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 후 부산에서 이삿짐센터를 운영하며 재기를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25년 전쯤, 세상을 떠난 막냇동생의 아내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은 할아버지. 제수씨가 서울역 주변에 나타난다는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2년간 서울역 주변에서 노숙 생활을 했다. 매일 술에 의지해 살면서도 서울역을 떠날 수 없었던 건, 언젠가는 마주쳐 내가 일궈 온 것들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마음, 잠시 잠깐 자리를 떠나면 또다시 놓쳐 버릴까 하는 조바심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시간은, 그곳 쪽방촌까지 흘러왔다. 충격으로 세 번이나 쓰러졌던 할아버지. 사람과 재산, 건강까지 모든 것을 잃고, 오직 죽고 싶은 생각이 종일 머릿속을 맴도는 우울증의 나날들. 할아버지는 그 순간을 떨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집 밖에도 나갈 수 없었던 것은, 길을 걷는 저 많은 사람 중에 나 하나쯤 사라져도 아무도 슬퍼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죽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붓을 쥐었다고 한다. 한 번도 배운 적은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할아버지는 수급비를 차곡차곡 모아 물감과 붓을 사고, 그 작은 도화지 위에 다른 삶을 그려 나갔다. 0.6평 남짓한 할아버지의 방에 점점 쌓여 가는 그림을 더 둘 곳이 없어 덧칠로 시간을 보낸다는 할아버지.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뒤, 다시금 그림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그림을 닮았던 것은 할아버지의 형편으로 살 수 있는 화집이 한두 권이라 닳을 때까지 보았기 때문이고, 붓 자국이 많이 보였던 것은 새로운 캔버스를 살 수 없어 수없이 덧칠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그림들은 달리 보였다.

생의 의지를 놓아버리고 싶은 누군가에게, 그런데도 이렇게 생은 이어지고 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그림들. 어느새 그 화폭을 통해 할아버지는 꿈을 가지게 되었단다. 그림을 통해 자신처럼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 재능을 기부해 누군가에게 ‘이런 나도 살아간다’고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이 싹텄단다.

죽고 싶은 마음을 떠나려 어딘가로 도피하듯 그려 낸 그림들. 아이러니하게도 그 속에는 생이 있었다. 가끔은 도망치듯 시선을 돌리는 곳에 또 다른 생이 있다는 것을. 할아버지의 붓질은 말하고 있었다. 며칠 뒤엔, 할아버지의 첫 개인전을 위해 크라우드펀딩(대중 모금)을 준비하고 있는 지인을 따라 이번엔 나도 그 쪽방엘 들러볼 참이다. 가장 어두운 명암을 딛고 일어난 강렬한 생의 의지를 담은 명화가, 그 쪽방촌에 있다.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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