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애(愛)ㆍ13] 독일전 앞두고 기성용 부상 심각, 감독에게 전할 때 가장 곤혹
2014년 국가대표팀 주치의…선수들의 몸 보다 마음의 치유가 중요
사비 털어 천연잔디 구장 마련할 만큼 못 말리는 축구 사랑
이성주 축구 국가대표팀 주치의는 지난 4일 경기 이천시 현대의원에서 만나 “선수들에게 진짜 필요한 진료는 육체적인 재활을 넘어선 마음의 치유”라고 말했다.

“기성용(29ㆍ뉴캐슬)은 못 뜁니다.”

잔인했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지만 감당해야 할 무게감이 여느 때와는 달랐다. 월드컵이란 큰 무대에서 한국 대표팀의 주장이자 핵심 전력인 기성용의 이탈 소식을 전해야만 했던 심정은 그 만큼 괴로웠다. 지난 4일 경기 이천 현대의원에서 만난 2018 러시아월드컵 한국 대표팀 주치의 이성주(55) 박사. 그에게 대회 기간 동안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묻자 “16강 진출의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던 독일과의 조별리그 3차전을 앞두고 멕시코전에서 다친 기성용의 오른쪽 종아리 부상 정도를 알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당시 신태용 감독에게 전한 멘트도 또렷하게 기억했다.

“지금까지 대표팀과 많은 경기를 함께 치렀지만 이번 월드컵이 가장 힘들었어요. 부상 선수들이 유난히 많았거든요. 사실, 이번 러시아월드컵은 차와 포를 떼어내고 경기에 나선 대회였습니다.” 이 박사는 출항부터 회항 하기까지,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생긴 신태용호(號)의 전력 누수를 최소화 시킨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 박사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러시아월드컵에서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팀의 미래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많이 아쉽죠. 우리가 이겼던 독일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능력만 감안하면 16강 이상도 기대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이번 러시아월드컵을 통해 우리 선수들이 제 기량만 발휘한다면 세계 어느 나라와도 충분히 해볼 만 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건 대단한 수확입니다.” 그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인 독일에게 2대0의 완승을 거두면서 얻은 자신감을 가장 큰 성과로 평가했다. 이 박사는 지난 2014년 9월, 울리 슈틸리케(64) 전 감독 부임 이후 현재까지 국가대표팀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이성주 축구 국가대표팀 주치의는 지난 4일 경기 이천 현대의원에서 만나 “러시아월드컵 16강 진출의 실낱 같은 희망이 걸린 독일전을 앞두고 당한 기성용 선수의 부상 상태를 감독에게 전해야 했던 순간이 가장 곤혹스러웠다”고 말했다.
못 말리는 축구 사랑, 축구장에 잔디 깎는 차량까지 갖춰

이 박사 인생에서 축구를 빼놓을 순 없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좋아하긴 했지만 진짜 축구의 매력에 빠진 건 경기 금촌의료원 근무 당시 사내 축구 동호회에 참여하면서부터였어요. 흉부외과 과장과 응급팀장으로 정신 없이 지내던 시절, 축구는 저에게 탈출구였습니다. 축구 덕분에 골프를 포함한 모든 취미를 정리했습니다.” 20년 전 기억을 떠올린 이 박사의 얼굴은 금세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수술실과 진료실을 톱니바퀴처럼 오갔던 서울의 한 대형병원을 그만 두고 지난 1999년 경기 이천의 한적한 곳에 개원한 그는 축구에 대한 과감한 투자도 진행했다. 천연잔디 경기장(가로 90m, 세로 50m)에 미국에서 직접 구입해 온 2대의 잔디 깎기 전용 소형 차량과 1대의 제설차까지 갖추고 매주 인근 주민과 함께 경기를 즐긴다.

이 박사의 못 말리는 축구 사랑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매년 경기장 관리에만 들어가는 비용이 적지 않아요. 아내에게 솔직히 ‘미쳤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버는 대로 축구장에 쏟아 부으니, 통장에 남은 돈은 거의 없으니까, 아내 입장에선 당연한 불만이죠. 그래도 ‘건강한 게 저축하는 것’이란 논리로 아내를 설득했고 지금은 제 입장에서 많이 이해해 줍니다.” 열정은 내공으로 쌓였다. 이 박사의 축구 실력 또한 이미 검증된 상태다. 지난 2006년부터 매년 대한의사협회 대표로 세계의사축구월드컵에도 출전할 만큼, 그의 축구 실력은 의료계에선 꽤 알려져 있다. 국가대표팀 주치의로 일하게 된 것도 축구에 대한 그의 이런 열정과 무관치 않다.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진 상대팀 선수를 심폐소생술로 살린 사례가 축구협회 관계자의 귀에 들어가면서 국가대표팀 주치의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팀 주치의는 5명의 팀원들과 함께 부상 선수 발생 시 회복에 필요한 빠른 응급 조치부터 재활 치료와 도핑 방지, 고가의 의료장비 관리 감독 등을 한다. 러시아월드컵 기간엔 매일 자정을 넘어서까지 선수들의 뭉친 근육을 풀어 주기 위해 마사지 서비스도 제공했다.

이성주 축구 국가대표팀 주치의가 지난 4일 경기 이천 현대의원에서 환자의 혈압을 측정하고 있다.
주치의는 선수들의 마음 치료가 더 중요

하지만 축구 국가대표팀 주치의는 주어진 역할에 비해 실속은 없다. 오히려 손해가 크다. 해외 원정 경기에 합류할 경우 항공권과 숙박비에 더해 100달러(약 11만1,000원) 정도의 1일 수당이 전부다. 국가대표팀 주치의가 자원봉사에 가깝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1년에 4개월 가량, 국가대표팀을 따라 해외에 나간다고 보면 됩니다. 병원으로 봐선 마이너스죠. 금전적인 부문에선 수입의 3분의2가 줄어드니까요.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은 따로 있거든요.”

이 박사는 주치의의 진짜 역할로 스웨덴과 멕시코에 당한 2연패 이후 침통했던 대표팀 분위기 반전을 예로 들었다. “독일과의 마지막 경기를 앞둔 날이었어요. 실전을 앞두고 진행되는 공개훈련을 하려면 부상 방지를 위해 다리나 팔 등에 부상 방지용 테이핑을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선수들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확인해 보니, 이미 의욕이 꺾였더라고요. 방마다 찾아 다니면서 테이핑을 해줬지만 가라 앉은 분위기는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이 박사에겐 긴급 처방전이 필요했다. 그는 고민 끝에 지혜롭게 대응하면 물리적으로 큰 거인에 맞서 이길 수 있다는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대표팀 선수들의 단체 카카오톡 방에 올렸고 “마지막까지 해보겠다”는 여러 선수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성주(두 번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 축구 국가대표팀 주치의가 지난 달 21일(한국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F조 조별리그 독일과의 3차전에서 2대0으로 승리한 직후, 라커룸에서 선수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성주 박사 제공

“뿌듯했죠. 마지막 독일전 승리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탤 수 있었던 것 같았거든요. ‘이거였구나’ 싶었어요. 저를 찾아온 선수들에게 어디가 가장 아프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까닭을 알았으니까요.” 이번 러시아월드컵 기간 내내 각종 인터넷 악성 댓글 등으로 일부 선수들은 이 박사에게 심각한 심리적 불안 증세를 토로했다. 육체 보다 마음의 치료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지난 18년 동안 매월 2차례씩 자신의 병원 인근에서 노약자 무료 진료를 통해 축적된 이 박사의 진료 데이터와 동일했다. 그래서일까. 이 박사는 자신의 갈 길은 정해졌다고 했다. “마지막까지 저는 선수들과 함께 경기장에서 뛰어야죠. 멈출 순 없어요. 제 손길이 필요한 선수들이 있으니까요.” 그의 마음은 어느 새 2022년 카타르월드컵으로 향해가는 듯 했다.

이천=글ㆍ사진 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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