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제독 정화가 1405년 7월 11일 남해 원정을 시작했다.

헤이든 화이트

가 역사를 픽션이라고 판단한 실천적 의미는 도그마로서의 역사를 경계하자는 거였다. 그는 역사가 신화나 지배질서, 통치이념과 분화하지 않고 공존하던 근대 이전의 역사와 현대인의 언어적 해석(역사 해석의 메타성)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혔다. 예컨대 동ㆍ서양사가 각각 서양과 동양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다분히 미심쩍은 이분법적 관점들을 그 자체로 역사 해석의 소재가 되게 했다. 진실에 허구를 뒤섞은 편향의 역사는 지금도 적지 않다.

15세기 말 본격화한 유럽 ‘대항해시대’를 훨씬 앞질러, 또 바스코 다 가마 등 그 시대 세계사적 영웅들의 업적과 위용을 뛰어넘어 남해 원정의 대역사(大役事)를 이룬 중국 명나라 제독 정화(鄭和, 1371~1434)의 이야기가, 그를 다룬 여러 판본들이, 그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예라 할 만하다.

정화가 야심 찬 정복 군주였던 영락제의 명을 받아 1405년 7월 11일 남해 원정에 나섰다. 콜럼버스보다 근 한 세기 앞선 시점이었다. 몽골의 대제국(원)을 이은 명의 세계지리 지식은 당연히 유럽보다 앞서 있었고, 수평선 너머에 낭떠러지나 괴물이 버티고 있을지 모른다고 믿던 이들과 달리 인도 너머로 이어진 뱃길(의 존재)을 이미 알고 있었다. 유럽 개별 왕실과의 투자ㆍ이윤 계약으로 시작된 벤처사업적 성격의 탐험들과 달리 정화의 원정은 조공을 걷기 위한, 다시 말해 정복ㆍ복속을 위한 왕(국가)의 주력사업이었다. 먼 항해가 되리라는 걸 알았던 만큼 주선의 크기와 선단 및 병력의 규모도 엄청났다. 다시 말해 정화의 원정과 유럽 대항해시대의 그것은 성격이 판이한 항해였다. 정화 원정단의 주선 길이가 130m에 이르고 배수량이 최대 1만7,000톤 급이었다는 후대의 사료는 터무니 없는 과장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노략질을 일삼던 서구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달리 정화 원정단은 평화적 군사외교적 항해였다는 일부의 주장도 수긍할 만한 해석은 아니다.

정화는 34세에 원정을 시작해 63세에 배 위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7차 원정을 이끌며 인도양 너머 아랍 세계와 아프리카 동부 해안을 누빈, 가장 넓은 세계를 가장 앞서 경험한 탐험가였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업적과 서구와의 대결적 상상력에 갇혀, 윈난성의 무슬림 출신 복속 포로로 유년에 거세당해 환관이 되고, 황제의 신임을 얻어 대제독이 되기까지의 삶의 이력은 묻힌 면이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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