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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는 북한, “새출발하자”는 일본… 짝사랑의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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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는 북한, “새출발하자”는 일본… 짝사랑의 내막

입력
2018.07.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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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일 노골적 맹공 퍼붓는 北에 

 벽창호처럼 ‘러브콜’ 보내는 日 

 선린우호ㆍ평화 앞세우는 北도 

 속으론 계산기 두드릴 거란 판단 

 교도 “北, 日에 제재 완화 요구”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연합뉴스

일본을 꾸짖는 북한의 서슬이 시퍼렇다. ‘죄악’, ‘악행’, ‘추태’ 등 원색적 표현을 동원해가며 연일 맹공이다. 잘못을 뉘우치면 기회를 주겠다고는 하지만, 잘 지내보려는 기색이 전혀 아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아랑곳없다. 이미 돌아선 상대방한테 벽창호처럼 고집스레 구애하는 형국이다. “새출발 하자”면서도 과거를 반성하라는 상대 요구에 관심이 있는 듯하지는 않다.

북한이 일본을 맹비난하는 액면상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과거사(史)다. 지난달 29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죄악의 과거를 덮어두고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일본이 줄곧 제기해 온) 납치자 문제로 말하면 도리어 우리가 일본에 대고 크게 꾸짖어야 할 사안”이라며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ㆍ징병, 위안부 공출 등을 거론하고, “일본의 국가 납치 테러범죄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우리 민족”이라고 강조했다.

4일에도 이 신문은 “일본이 과거 청산 문제를 뒷전으로 미뤄놓으려고 하는 한 언제 가도 지역에서 외톨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더 큰 빌미는 일본의 적대시 정책이다. 노동신문은 5일 ‘반인륜적 악행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제하 개인 필명 논평을 통해 “(일본이) 반공화국 적대시 책동의 일환으로 재일동포들의 인권과 생활권을 마구 짓밟고 있다”고 성토했다. 일본 세관당국이 북한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의 기념품까지 압수한 사실을 언급하면서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도 3일 논평을 통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북일 정상회담 성사를 최우선 외교 과제로 규정했다는 내용의 일본 언론 보도를 언급한 뒤 “계속 우리를 물고 늘어지며 ‘납치 문제’를 쉴 새 없이 떠드는 한편 대조선(대북) 제재 압박에 대해 목청을 돋구고 있다”며 “이것은 입으로만 대화를 말할 뿐 머릿속은 온통 대조선 적대 열기로 달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이튿날도 “앞에서는 대화를 운운하고 뒤에서는 제재 압박을 떠들며 국제사회의 면전에서는 인권 옹호국으로 행세하고 돌아앉아서는 온갖 민족 차별적, 반인륜적 악행”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속내는 다를 거라 믿어서인지 일본은 부쩍 노골화한 북한의 매도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다. 칭찬과 선물을 동원해 일방적 구애 공세를 퍼붓고 있다. 전하는 메시지는 초지일관 “일본인 납치자 문제 얘기 좀 해보자”는 것이다. ‘러브콜’이 강해진 건 6ㆍ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부터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18일 참의원 결산위원회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실현한 지도력이 있다”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치켜세우며 “북한과 일본 사이에도 새 출발 계기가 마련돼 상호 불신이라는 껍데기를 깨고 납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말했다.

앞서 같은 달 16일 요미우리TV 인터뷰에서는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선 김 위원장의 큰 결단이 필요하다. 크게 기대한다”며 “핵 위협이 없어짐에 따라 평화의 혜택을 받는 일본 등이 그 비용을 부담하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대북 지원 의향을 피력한 것이다.

일본이 보내는 신호는 꾸준하고 일관적이다. 일본 정부 대변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5일 다시 “납치 문제 해결에는 큰 결단이 필요하다”며 “김 위원장에겐 북미 정상회담을 실현한 지도력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일본)는 북일 관계에서 새 스타트를 끊어 납치 문제에 대해 상호 간 불신의 막을 깨고 한 걸음 내디디고 싶다”고도 했다.

일본인 납치자 문제 해결의 여지는 딱히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북한은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는 입장을 관영 매체 등을 통해 누차 밝혀 오고 있다.

아베 정권은 정치적 이해관계에만 혈안이라는 게 북한의 믿음이다. “이미 해결된 납치 문제를 끄집어내서 자신들의 이익을 얻으려 (일본이) 획책하고 있다. 국제사회가 일치해 환영하는 한반도 평화 기류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는 치졸하고 어리석은 추태”(지난달 15일 북한 국영 평양방송)라거나, “일본이 대화에 대해 떠드는 것은 진정으로 조일 관계 개선을 바라서가 아니라 격변하는 조선반도 정세 흐름에서 밀려난 궁색한 처지를 모면하고 뒤늦게나마 조선반도 문제에 끼어들어 한몫 보려는 일본의 간특한 타산에 따른 것”(3일 조선중앙통신)이라는 식이다. 아베 총리는 9월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계산기를 두드리는 건 북한 역시 마찬가지라고 일본은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말처럼 북한이 오로지 선린우호나 평화만 바라는 순수한 마음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완강해도 ‘거래’나 협상의 기회가 없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여기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적대 관계 청산이라는 북미 정상회담 합의 탓에 일단 표적에서 미국을 지워야 하는 북한 입장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결속해내려면 일본한테 몰매를 가하는 일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자본주의를 미워하도록 가르치는 북한 계급교양의 주요 타깃이던 ‘미제’가 북미 정상회담 직전부터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내용으로 계급교양이 채워지고 있다. 2~3일에 한 번꼴로 계급교양관 참관기를 소개하는 조선중앙TV도 지난달부터는 일제의 조선 침략 역사와 만행을 규탄하는 목소리들만 내보내는 형편이다.

명분론으로 변죽을 울리고 있지만 북한이 정작 얻어내려 하는 건 대북 제재 완화일 거라고 일본은 자체 분석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아베 정권에 북한이 유독 냉랭한 것도 한미일 동맹 중 순수한 강경파가 이제 일본뿐인 데다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경제 지원이나 제재 이완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북일 대화를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여겨서일 거라는 의견이 일본 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5일 일본 교도통신이 “북한이 제재 완화를 납치 피해자 조사 재개 조건으로 내세웠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일본 정부가 진의를 신중히 분석 중”이라며 북한 측이 납치 문제를 놓고 벌인 일본과의 물밑 협의에서 일본이 독자 제재를 완화하지 않는 한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생각을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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