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그림책공작소 제공

시시때때 주말을 반납하며 “집에 다녀오겠습니다”고 말하는 식의 무제한 근무가 일상이었던 두 번째 밀레니엄(1001년~2000년) 시기 직장인 경험이 몸에 새겨진 모양이다. 금요일 오후부터 시작되는 이즈음의 주말 풍경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평일에 휴가를 즐기는 젊은 부부를 보면서 한창 일할 나이에 일자리를 잃었나 보다, 오해했다가 혼자 얼굴 붉히는 일도 적지 않다. 가장 어리둥절하기로는 서점의 처세 실용 부문 진열대 책들이 ‘시간 관리(쥐어짜기)’ 류에서 어느새 ‘게으를 권리’와 ‘삶과 일의 균형 잡기’ 류로 바뀐 것이다.

얼마 전 감기 몸살로 연차 휴가를 내고 쉬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업무에 복귀한 회의 자리 첫 발언을 접하면서야 변화를 실감했다. 과로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늘 강조하다가 과로로 탈이 났다는 말까지 듣게 돼 민망하다, 라는 대통령의 소탈한 소회에서 우리 사회의 건강을 진심으로 도모하고 구현하려는 진정성을 읽었다.

물론 삶의 질을 우선시하는 사회가 정책과 시스템의 진화 발전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개인이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혁신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를 미덕의 교본으로 삼으며 격동의 역사를 버텨 온 유전자가 경쟁 구도 너머의 자연스럽고도 참다운 시간을 향유하자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포르투갈의 양양한 햇살이 쨍쨍한 색채로 표현된 그림책 ‘속도와 거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는 하얀 자동차를 탄 일가족이 “이제 여행을 떠나자!”라고 외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기차 앞에서 승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청소부들이 대롱대롱 매달린 고층빌딩, 게시대의 광고물을 교체하는 사람들, 쇼윈도 안쪽에서 마네킹을 조립하는 사람과 검은 개가 돌아다니는 이미지들은 배경 공간과 시간이 도심의 새벽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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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자동차는 엉킨 실타래 같은 도로들과 맞닥뜨리면서 비상등을 켜고 멈춘다. 운전자가 지도를 펼쳐보는 사이, 뒷좌석 동행자들은 잠깐 바깥 공기를 쐬거나 부채질을 하며 기다린다. 다시 출발했지만 이번에는 도시의 정체 구간, 갈 길이 바쁜 이들은 답답하겠지만 독자는 승차 구성원이 제 각각인 이 자동차 저 자동차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길이 막힌 김에 하얀 자동차에서 내린 일가족은 하역 작업으로 어수선한 부둣가에서 건너편 풍경을 감상하며 숨을 고른다. 그런 다음 하얀 자동차가 지나게 된 곳은 더없이 한가하고 평화로운 전원 마을, 장발을 휘날리며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남자와 농사 지은 수박과 호박을 쌓아놓고 졸거나 신문을 보는 사람들과 나홀로 자전거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과 드라이브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어느새 어둑한 시간의 숲속을 지나면서 하얀 자동차는 벌채 작업꾼들을 만나고 부엉이와 다람쥐와 노루를 스치기도 한다.

하얀 자동차는 달린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방향을 뒤집기도 하고, 양양한 햇살이 쏟아지는 목축지를 지나기도 하고, 터널을 지나기도 하고, 스키장 야영 구역을 지나기도 하고, 험한 산길에서 타이어가 터져 멈추기도 한다. 동물들이 자동차를 타고 달리고 인사를 건네는,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지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착한 바닷가 해변! 공용 주차장에는 또다른 하얀 자동차와 노란 자동차, 검은 자동차가 쉬고 있다. 이제 모두가 쉬는, 쉴 수밖에 없는 시간과 공간에 이른 것이다.

속도와 거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마달레나 마소토 지음∙민찬기 옮김
그림책공작소 발행∙40쪽∙1만3,000원

그러나 이 여정이 전부가 아니다. 이 그림책의 열다섯 장면 모두가 위아래 반으로 잘려져 장면마다 위와 아래를 같이 넘길 수도 따로 넘길 수도 있게 되어 있다. 출발과 도착은 같지만, 독자의 의지에 따라 하얀 자동차는 수많은 경우의 수(최대 225가지)를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도로노선도 같은 납작한 기하학적 이미지의 색종이 사람과 나무와 길과 자동차 그림은 이 과감하고도 단순한 아이디어에 의해 입체적 공간과 시간 속에 부풀어 오른다. 장면 곳곳에 숨어있는 수많은 작은 존재들과 사물들은 입체성을 한껏 살려내면서 어린 독자들을 기쁘게 한다.

하얀 자동차는 대체 몇 시간 몇 ㎞를 달린 것일까? 이 그림책의 포르투갈어 원제는 ‘0킬로미터(Conta-Quilómetros)’, 마달레나 마토소는 그야말로 “속도와 거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는 결국 우리가 원하는 만큼, 그리고 경험하는 만큼의 시간과 공간을 누리는 게 아닐까요”라고 발랄한 메시지를 건네는 듯하다.

이번 휴가 여행은 효율성과 경제성을 놓아버리고 마달레나 마소토 식의 ‘제로 킬로미터’의 무한 시공간 체험을 목표로 삼아보자.

이상희 시인∙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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