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 근로제도가 시행된 1일 부산항 7부두 인근 물류회사 주차장이 멈춰선 화물차량으로 가득 차 있다. 연합뉴스

국립대 의대 A(43)교수는 10년 전 미국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참석, 전공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의대 교수의 수술시연(Live Surgery)을 볼 기회를 접했다. 권위자의 집도를 대형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던 중 A교수는 생경한 장면에 아연실색했다. 수술을 돕던 전공의(레지던트)가 갑자기 수술실을 떠나버렸던 것. 퇴근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였다. A교수는 “집도의도 수술실을 나서는 레지던트에게 ‘잘 가’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충격이었다”고 술회했다.

수년 전 직접 들은 이 일화가 문득 떠오른 건 최근 방한한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의 발언을 접하면서다. 크루그먼 교수는 우리나라가 이달 1일부터 주당 최대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단축’시키기로 했다는 말에 “52시간이라고요? 한국도 선진국인데, 그렇게 많이 일한다니요”라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해외 주요국에서는 당연시 되는 근로자의 권리(적은 근로시간)가 우리에겐 이처럼 낯설고, 줄이고 줄인 우리의 근로시간은 선진국이 보기엔 의아스러운 현실을 보자니 안타깝다. 법만 지켰어도 우리나라 근로자들은 이미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1953년 근로기준법 제정 당시 우리나라는 1일 8시간, 주당 48시간 근로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산업현장에서 법조항은 단순한 문구에 불과했다. 청년 전태일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며 법전과 함께 자신의 몸을 불사른 배경이다. 그후 19년이 지난 1989년 법정 근로시간은 주 44시간으로 단축됐고, 다시 14년이 지난 2003년 주 40시간으로 낮아졌다.

법정 근로시간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그 어느 나라 부럽지 않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실제 지켜지지는 않았다. 성장 일변도에 사로잡힌 정치권과 기업들이 무시한 탓이 크다. 일을 더 많이 해야 더 많이 벌 수 있다는 인식을 근로자들에게 강요했다. 기본급은 낮게 책정한 채 연장ㆍ휴일근로를 하면 더 많은 임금을 주겠다는 ‘당근’을 제시했다. 근로자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딸린 식구들을 떠올리며 야근은 물론 휴일에도 나가 일했다. 그렇게 우리는 세계 최장 시간 근무시간에 익숙해졌다.

뒤늦게나마 지난 2월 정부와 국회가 최장 근로시간을 단축한 것은 다행이다.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이지만 가야 할 길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안착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기업의 참여가 가장 중요한 데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경총)는 지난달 말 “6개월의 계도기간을 달라”고 건의했고, 정부는 받아들였다. 경총은 “제도가 안착할 수 있도록 기업들이 앞장서 노력하겠다”고만 밝혔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줄어드는 근로자 임금 축소 등의 문제는 “일하는 방식을 개선, 생산성과 연동해 최대한 보전하겠다”는 말로 갈음했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 내용은 없었다.

세계 최장 근로시간 문제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도 기업들은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극히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 채용하겠다고 나서는 기업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근로자들의 임금 삭감을 방패막이 삼아 예의 인가연장근로 허용 범위 확대,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면 주5일 근무제를 도입했던 2004년의 데자뷔다.

일본은 최근 우리나라 주 52시간제와 비슷한 과로방지 금지법인 '일하는 방식 개혁법’을 도입했다. 하지만 기업들이 받아들이는 모습은 양국이 극과 극이다. 일본 기업들은 직접 ▦잔업수당 상여금 환원 ▦복리후생 포인트 인상 ▦잔업 없애는 직원에 수당을 주는 ‘No 잔업수당’ 인상 등 대안을 내놓았다. 2016년 기준으로 일본은 우리(연 2,069시간)보다 훨씬 적은 연 1,713시간을 일하는 데도 말이다. 걸핏하면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했던 기업들이 근로시간에서도 이를 적용하길 바란다. 전국민이 6개월 뒤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대혁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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