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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허업(虛業)의 정치

입력
2018.06.25 18:56
수정
2018.06.26 11:1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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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별세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만큼이나 많은 어록을 남긴 정치인도 드물 것이다. ‘유신 잔당’이라는 비판에 “내가 왜 잔당이냐 유신 본당이지”라고 맞받아치는가 하면 1980년 신군부 시절 ‘춘래불사춘’이라는 말로 민주화의 좌절을 예언했다. ‘무항산 무항심’ ‘줄탁동시’ 등 동양고전이나 사자성어를 자유자재로 인용한 것에 비춰 보면 고인의 어록은 단순한 말재간 이상이다. 그래서 고인을 아는 이들은 그를 세상사 막힘이 없는 르네상스적 인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 동시대를 살며 경쟁한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각각 뚝심의 정치인과 행동하는 양심이라면 JP에게는 여유와 유머의 코드가 넘쳐났다. 특히 고인의 언어에는 충청도 특유의 느긋함이 한껏 배어 있다. 도지사를 지낸 이인제가 충청 맹주 자리를 노리며 ‘서산에 지는 해’라고 공격하자 “나이 70넘은 사람이 떠오르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지면서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였으면 한다”고 맞받아친 일화가 대표적이다. ‘충청도 핫바지론’으로 지역 민심을 흔들기도 했지만 아무리 화가 나도 “그 사람 참 심하구만”하는 정도에서 그칠 줄 아는 그는 천상 충청도 사람이었다.

▦ 그런 고인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막말을 퍼부었다는 사실이 잘 믿겨지지 않는다. 지난해 대선 직전 자택을 찾은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를 만난 자리에서 JP는 “이런 놈을 머를 보고 지지를 해”라면서 문 대통령을 지칭한 뒤 “김정은이가 자기 할아버지라도 되나? 빌어먹을 XX”라고 거칠게 퍼부었다. 아무리 보수 후보를 응원하는 메시지라지만 평소 JP의 화법과는 크게 달랐다. 친문 진영에서 JP의 독재권력 부역을 문제삼아 훈장 추서를 반대한다는 소식에 저 악연의 장면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짐작만 해 볼 뿐이다.

▦ JP 어록 가운데 압권은 아무래도 ‘허업(虛業)의 정치’가 아닐까 싶다. 2011년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대표에게 던진 이 메시지를 JP는 나중에 “기업인은 노력한 만큼 과실이 생기지만 정치인은 과실이 생기면 국민에게 드리는 것”이라며 뜻을 풀이했다. 하지만 평생을 2인자로 살아온 그에게 정치는 말 그대로 허상 아니었을까. 고인은 ‘아흔을 살았지만 지난 89년이 헛된 것 같다. 많은 질문에 그저 미소만 짓는다’고 알듯 모를듯한 묘비명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김정곤 논설위원 jk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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