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좌절되기는 했지만 2011년 무렵 김종필 전 총리가 어렵사리 결심을 하고서 5ㆍ16 비화를 비롯해 박정희 정권 18년의 이야기를 털어놓겠다 해서 여러 차례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른 신문에 회고록이 연재되기는 했지만 애초에 필자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는 하나도 그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대부분 ‘김형욱 회고록’ 등에 공개된 수준을 넘지 못하는 범범(泛泛)한 일화들 뿐이어서 쓴웃음만 짓고 말았다.

전문가들의 비판적 검토를 거쳐야 하겠지만 당시 김 전 총리는 분명하게 5ㆍ16의 주역은 자신이며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사 8기들이 선택한 ‘얼굴 마담’이었다고 말했다.

“혁명 설계도를 단 한 부만 갖고 있었는데 그 어른(박정희 소장)이 장도영(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 그걸 주라는거야. 처음에 난 못 주겠다고 했지. 그런데 그 어른이 그걸 장도영에게 주지 않으면 우리를 믿지 않을 것이라면서 꼭 넘겨줘야 한다고 해.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어. 그래서 줬지. 근데 그게 뒤에 없어져 버리니 어느새 나는 조연이 되고 그 어른이 혁명의 주인공이 된 거지. 글쎄 그 어른이 그것까지 내다보고 설계도를 넘겨 주라고 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아리송해.”

이런 식이었다. 분명한 것은 5ㆍ16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에서 한발 비켜나 거사 측면에서만 보자면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 전 총리의 관계는 조선 역사에서 태종과 하륜, 혹은 세조와 한명회를 떠올린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실제 역정을 보면 박정희는 태종에 가깝고 김종필은 한명회에 가깝다.

한명회는 개국공신 집안을 배경으로 했지만 불우했다. 1415년에 태어나 세종의 태평시대를 그저 그렇게 한량으로 보냈다. 그러나 일찍부터 포부는 컸다. 과거에 계속 낙방하는 그를 어떤 사람이 위로하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궁달(窮達)은 명(命)이 있는 것인데 사군자(士君子)가 어찌 썩은 유자(腐儒)나 속된 선비(俗士)가 하듯이 낙방에 실망하고 비통해 하겠는가?”

1453년 38살 한명회는 계유정난의 설계자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1961년 5ㆍ16을 일으켰을 때 김종필은 36세였다. 이후 한명회는 마침내 계유정난 10년 만인 1463년 정승 자리에 올랐다. 흥미롭게도 김종필 역시 5ㆍ16 10년 만인 1971년 5월 국무총리가 됐다.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한명회의 이름이 거론돼 투옥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사직서를 내며 배수진을 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김종필 또한 얼마 후 박정희에 의해 자신의 지지 세력을 거의 잃었다.

한명회는 그 후 예종과 성종의 장인이 돼 고려의 이자겸처럼 외척 정치를 도모했으나 두 딸이 모두 일찍 죽는 바람에 그 또한 물거품이 됐다. 그저 적당한 권세를 누리면서 전(前) 사위 성종과 밀고 당기는 권력관계를 유지하다 70세에 관직에서 물러났고 당시로서는 장수했다고 할 수 있는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0년 넘게 권세를 누렸다. 연산군 때 부관참시를 당했고 그 후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는 사림(士林)세력으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한명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김종필의 경우도 전두환 정권 7년을 제외하면 DJP정권 탄생으로 1998년 다시 총리가 돼 대통령을 제외한 거의 모든 권력을 누렸다. 그 권세를 누린 기간을 합산하면 아마 한명회보다 더 길지도 모른다. 물론 한명회는 한명회일 뿐이고 김종필은 김종필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김종필 전 총리의 타계 소식을 듣고서 곧장 떠오른 인물이 한명회라,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았다.

김 전 총리는 “나이 90살이 돼서 89살까지 잘못 살아왔음을 알겠네”라는 자찬 묘비명을 남겼다. 이렇게 세 거인(巨人)은 우리 곁을 다 떠나갔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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