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 오늘 헬렌 켈러가 태어났다. 그에게 앤 설리번(오른쪽)은 평생의 반려이자 든든한 디딤돌이었다.

작가 신경숙의 93년 작품 ‘새야 새야’에는, 소리란 걸 들어본 적 없는 청각장애인 형에게 언어 장애만 있는 동생이 글로 소리를 설명해주는 대목이 나온다. 노래 ‘동백꽃’ 가사의 ‘뚝뚝’이란 게 뭐냐는 형의 물음에 동생이 땅 글씨로 ‘꽃이 떨어지는 소리’라고 쓰자, 형이 다시 묻는다.

“소리? (움직이는 것들에게선 소리가 나.) 어떻게 알아? (귀에 들리는 거야.) 들린다고? 큰놈은 적막한 제 귀를 쓸쓸히 만져보았다.(···) 물은? (헤어지는 소리.) 뱀은? (눈이 감기는 소리.) 때까치는? (대문 여는 소리.) 바람은? (잠 깨우는 소리.)”

최근 방영된 tvN의 드라마 ‘나의 아저씨’ 마지막 회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왔다. 소리를 못 듣는 할머니가 “꽃잎이 떨어질 땐 어떤 소리가 나?”라고 묻고 손녀가 수화로 “좋은 소리”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글과 수화가 귀의 적막을 어쩌진 못할 테지만, 비장애인은 알 수 없는 적막 너머의 무엇을 전했을 것이다. 헬렌 켈러(1880.6.27~1968.6.1)는 후천성 시ㆍ청각 장애인이었다. 다행히 그는 집안이 넉넉해 좋은 보살핌을 받았고, 무엇보다 그에겐 앤 설리번(1866~1936)이 있었다. 14년 위인 설리번은 일곱 살 켈러에게 인형(doll)의 스펠링을 손바닥 글씨로 가르치고, 손에 차가운 물을 틀어주며 ‘water’를 가르쳤다. 헬렌이 대학을 다닐 때에도, 수업시간 곁에 앉아 필기를 돕고 숙제를 거들었다. 설리번은 가난 탓에 눈 질환 치료를 제때 못 받아 장애를 겪었고, 10대 말 교회의 도움으로 겨우 시력을 회복했다. 그는 장애뿐 아니라 장애 때문에 겪을 수 있는 부수적 상처까지 치유한 헬렌의 반려였다.

2012년 대선에서 낙선한 문재인 후보는 “비관주의자들은 지도에 없는 땅을 향해 항해한 적도 없으며···”라는 헬렌 켈러의 말을 트위터에 적어, 뭉클한 감동을 선사했다. 총리 전언에 따르면, 대통령이 된 지금도 저 말을 자주 인용한다고 한다. 국민에게 희망을 전하는 건 대통령의 중요한 역할이지만, 켈러가 “지도에 없는 땅을 항해”할 수 있게 해준 앤 설리번의 역할도 대통령의 가볍지 않은 책임이다. 그것이 정치이고, 행정이며, 그는 이제 낙선 후보가 아니라 최고권력자이자 행정부 수반이다. 대통령은 켈러의 듣기 좋은 말을 인용하기에 앞서, 대선 공약 이행을 촉구하는 장애인들의 호소

를 먼저 들어야 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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