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통 국가에서 오는 사람들을 다 받아줘야 하나.” 지난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이티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겨냥해 이렇게 말했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공공연히 무슬림과 히스패닉의 입국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한국에선 그런 그를 보며 자유의 나라 미국이 보여준 민낯을 조소했다.

그러나 한편에선 과연 한국이 그럴 자격이 있는지 진지하게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주 예멘 난민들을 향한 시선은 그런 우리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난민 수용 반대 청원은 답변 기준 20만을 가뿐히 넘기고 40만을 향해 가고 있다.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것은, 흔히 그러했듯, 보수층이나 개신교계만이 아니다. 심지어 여성계 일각에서도 같은 주장이 나오고 있다. 난민 수용은 여성들의 공포를 무시한 낭만적 주장일 뿐이며, 난민 수용을 막아 난민들의 여성차별 문화, 폭력, 강간 범죄로부터 여성들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물론 난민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최대한 많은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같은 인간으로서 마땅한 답이겠지만, 이질적 문화가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충돌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특히 무슬림 이주민들의 게토화는 수많은 나라가 나름대로 대책을 강구했음에도 피하지 못했고, 극단적 사건 사고가 일어나며 무슬림에 대한 편견을 더 공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사회 문제를 무슬림, 이주민, 남성이라는 정체성 탓으로 규정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구조와 맥락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특정 정체성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오히려 게토화를 유발하고 충돌을 일으킬 뿐 아닌가. 개별적 사례나 경험,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극단적 사건만을 갖고 선입견을 공고히 하는 것은 또 어떤가.

여기에 악의적인 가짜 뉴스가 더해지며 혐오는 더 힘을 얻고 있다. 예멘 난민들에게 세금이 무분별하게 투입되고 있다는 주장부터, 예멘 남성들이 이미 여성과 어린이들을 수상한 눈빛으로 보고 있으며 심지어 한국 여성을 임신시켜 한국에 눌러앉으려 한다는 등의 괴담이 무분별하게 유통되고 있다.

이건 기득권자들이 소수자, 약자를 적으로 만들던 바로 그 방식이다. 지난 총선 때 일부 보수 개신교계 정당은 할랄 단지를 조성할 경우 무슬림 30만명이 거주하게 되고, 테러와 성폭행이 급증할 것이라며 가짜 공포와 혐오를 퍼트렸다. 오늘날 자칭 여성주의자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난민들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퍼트리는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난민과 더불어 동성애자들이 적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도 얄궂다. 괴담의 형태도 에이즈로 세금 폭탄이 떨어질 것이라거나, 동성애자들이 사회를 파괴할 것이라는 식으로 똑같이 닮았다. 그들은 마침 사회적으로 가장 인정받지 못하는 약자들 중 하나다. 사회 주류에서 요직을 차지하는 보수 개신교계의 행태와 여성들의 공포를 같은 것으로 볼 순 없지만, 분명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 약자의 권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이들이 다른 약자를 향해 차별과 혐오발언을 쏟아내는 것은 대체 무얼 의미하는가?

뮤지컬 ‘위키드’는 녹색 피부 때문에 차별받던 녹색 마녀 엘파바가 모든 것이 녹색으로 보이는 도시 에메랄드 시티에서 겨우 소속감을 느끼지만, 거기 소속되기 위해 다른 약자들을 차별할 것을 강요받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우리는 나와 다른 이들을 차별함으로써 오히려 우리끼리의 연대감을 얻는 것은 아닐까. 함께한다면 강해진다지만, 그 ‘함께’란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 우리는 정말 함께할수록 강해질 수 있을까. 지난 미국 대선에서 바로 그 문구를 구호로 내걸었던 클린턴은 노골적으로 혐오를 부추긴 트럼프에게 패했다. 어쩌면 이게 냉혹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임예인 슬로우뉴스, ㅍㅍㅅㅅ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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