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싱가포르= AFP 연합뉴스

지난 12일 오후 싱가포르 카펠라 호텔. 북미정상회담을 마친 뒤 기자들 앞에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표정은 상기돼 있었다. 그는 “오늘은 고통스러운 과정의 시작일 뿐이지만 평화를 위해서는 그런 노력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자국 인민들에게 놀랄만한 미래를 가져다 줄 기회를 맞이했다. 전쟁은 누구나 일으킬 수 있지만 평화는 용기 있는 사람만이 만들 수 있다”면서 70년 만에 이뤄진 이날 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충동적이고 즉흥적이며 종종 문법도 맞지 않는 트위터 글로 그의 메시지를 매일 접했던 국제부 기자의 시각에서 이 발언들은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것이 아닌지 착각할 정도로 진중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양됐던 분위기는 질의 응답 시간이 되자 반전됐다. “형제를 죽이고 인민들을 굶기고 오토 웜비어의 사망에 책임 있는 김정은을 어떻게 ‘재능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북한 인권에 대해 김정은에게 무얼 기대하느냐” 등 북한의 인권 상황을 비판하는 집요한 질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대답은 명료했다. “김정은과 비핵화 이야기를 했고 인권 얘기는 비교적 간단히 나눴다. 비핵화 이슈가 협상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북한 인권 문제의 원인을 오롯이 김정은 체제의 전체주의적 성격 때문이고, 체제 전복만이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맹신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북한을 두둔하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김정은 정권에 대해 ‘잔인한 독재자’(2017년 11월 8일 한국 국회 연설), ‘지구상 어떤 체제보다 인민들을 야만적으로 억압하는 정권’(2018년 1월 31일 연두교서)이라고 비판했던 이와 같은 사람의 말인가 귀를 의심했을 법도 하다. 이는 역으로 그 동안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공격이 실질적인 북한의 인권개선을 목표로 한다기보다는 북한 정권 창피주기를 통한 압박에 불과했다는 심증을 굳혀준다. 북한을 ‘악의 축’,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맹비난하며 탈북자 지원을 골자로 한 세계 최초의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키고도 5년 동안 예산 한 푼 집행하지 않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허울 좋은 북한 인권 비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 신뢰를 쌓고 관계를 정상화하지 않고는 현실적으로 북한의 인권 개선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을 자각한 것으로 보인다. 인권 문제의 근본 책임은 북한 정권에게 있지만, 70년이라는 유례 없이 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북한 정권에게 인권 탄압의 빌미를 준 점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북한이 요구하는 체제보장과 미국이 요구하는 비핵화ㆍ인권보장을 교환하는 방식은, 냉전 시기 서유럽 국가들이 동유럽에서 소련의 지위를 보장해주면서, 소련과 동유럽의 인권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한 ‘헬싱키 의정서’(1975년)에서 이미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인권문제 제기를 체제 위협으로 간주하는 북한에게 체제보장을 전제로 한 트럼프 대통령의 접근 방식이 실질적인 북한의 인권 개선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는 또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북한 인권이 ‘얼마나’심각한지를 알리는 것보다 ‘어떻게’하면 북한인권을 ‘실제로’ 개선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일일 터이다. 기자회견장에서 “오토 웜비어는 내 인생에 있어서 오랫동안 매우 특별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말은 진심일 것이다. 협상 중 진실을 말하지 않거나 말하는 것을 미룸으로써 돌파구를 열고 목표(인권 개선)를 달성하는 유연한 트럼프식 방식이 웜비어와 같은 안타까운 희생자를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왕구 국제부 차장 fab4@hankookilbo.com

관련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