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라 불리는 사람들은 어떤 존재일까? 평론가, 타인의 작업을 대상으로 하며, 말과 글을 도구 혹은 무기로 삼은 사람들. 도대체 미술 평론가는 왜 붓 대신 펜을 잡은 것이며, 문학 평론가는 왜 소설이나 시가 아니라 타인의 작품에 대해 쓰는 것일까? 평론가를 혐오하거나 극악에 가까운 독설을 퍼부은 작가들의 예는 무수히 많다. 작가들에게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계속 평론가라는 직업이 유지되는 이유가 늘 궁금했다.

공예 비평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나는 그 이유를 납득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평론가란 타인의 작업을 통해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평론가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작가ㆍ작품을 분석하고 해설해서 대중이 보다 쉽게 작가ㆍ작품에 접근하도록 도와주는 사람, 정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무리가 많다. 평론가들은 대개 작가들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한 사람들이다. 공부를 한 사람에게 자의식이 생겨나지 않을 리 없다. 어쩌면 그들은 작가들보다 훨씬 더 깊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단지 다른 사람의 안내자 역할로 만족하리라 보는 것은 무리다.

외교관이 병자호란을 소재로 열강에 낀 한국의 외교 전략에 대해 설명하듯, 극작가가 바리데기 신화를 소재로 인간의 슬픔에 대해 쓰듯 평론가에게 작가ㆍ작품이란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예시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모 평론가는 “저는 여러분 편을 들려고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을 통해 내 이야기를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단호히 말했다. 동석한 다른 작가들의 실망한 표정과 달리 나는 평소 모호하게 생각했던 그 평론가의 태도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고, 그를 긍정하게 되었다.

공예가들은 평론을 대할 때 흔히 “저 평론가는 공예에 대한 애정이 없어. 현장도 몰라!”라고 불만을 토로한다. 나는 공예 평론가가 왜 공예에 대한 애정을 가져야 하는지, 왜 현장에 대해 깊이 알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공예 평론가가 애정을 가져야 할 것은 ‘평론’이라는 자신의 분야이며, 그가 깊이 알아야 할 것은 ‘평론의 현장’일 것이다. 평론가는 ‘공예’를 팔아 사는 사람이 아니라 ‘평론’이라는 글을 파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예에 대한 애정과 현장의 지식은 공예가들의 몫이다.

공예 평론가는 공예를 미워해서도 사랑해서도 안 된다. 애증을 조절해 평심을 유지하는 것이 평론가의 올바른 태도이다. 또한 평론가가 현장을 너무 깊이 알게 되면 평론에서 가장 중요한 객관성이 흐려질 가능성도 높다.

나는 평론가란 어휘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휘를 만드는 사람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작업자는 평론가가 만든 어휘가 적절하다 판단되면 가져다 쓰면 되고, 적절치 않다고 판단될 때는 외면하면 된다. 만약 그 어휘가 틀렸다면 반드시 지적을 해야 한다.

말과 글이라는 도구에 익숙지 않은 공예가들이 평론가에게 자신들의 작업과 처지를 대변해 주기를 원하는 것은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공예가들의 바람일 뿐 평론가의 의무일 수는 없다. 강요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다.

평론가가 말하는 내용이 틀리다면, 또 그 틀린 내용이 공예가들에게 피해가 있다면 스스로 논리와 근거를 만들어 반박하면 된다. 평론가들만큼 말과 글에 익숙지는 않겠지만, 대신 공예가들에게는 작업과 현장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지 않은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평론가들의 말과 글과 싸우지 않은 채 평론가들에게 애정을 구걸하고, 관심을 달라고 칭얼대며, 뒤에서 투덜대거나 피해버리는 자세가 계속되는 한 평론가는 독주할 것이다. 평론에 대한 공예가들의 관심이 절실한 때이다.

김윤관 목가구공방 대표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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