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784년, 이벽의 도장 깨기

이벽과 함께 답안을 연구 마테오 리치의 개념을 끌어와 주리와 주기의 논쟁에 대입 다산은 이후 이벽을 더 신뢰 천주학에 급격히 빨려들어가 이벽은 유명학자들과 논쟁서 차례차례 ‘도장 깨기’에 성공 천주교가 요원 불길처럼 번져
서학과 유학, 양 진영에서 벌인 사흘간의 대토론회 장면. 이 토론회에서 이벽은 천주교리를 바탕으로 당대의 천재라 꼽히던 이가환을 격파했다. 탁희성 그림, 김옥희 수녀 제공
외딴 방

1784년은 한국 천주교회의 원년이었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동지사 일행을 수행해 서울에 도착한 것은 3월 24일. 목을 빼고 기다리던 이벽은 그 길로 이승훈을 찾아가 천주교 교리서를 전해 받고 북경에서 영세 받던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이벽은 아예 외진 곳에 방을 구해 틀어박혀 본격적으로 교리 연구에 돌입하였다.

누이의 제사에 참석하고 오는 길에 다산 형제에게 선상(船上) 강의를 한 것이 4월 15일이었으니, 그는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다산의 자형인 이승훈이 가져온 천주교 교리서를 집중 탐구했다. 다산 형제가 그의 첫 포교 대상이 되었다.

선상 강의 11일 뒤인 4월 26일 정조는 성균관의 제생들에게 ‘중용’에 대한 70가지 질문을 내려 여기에 답할 것을 명했다. 다산의 본격적인 ‘중용’ 학습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벽은 기꺼이 안내자 역할을 맡았다. 임금의 질문은 묵직했고, 대답은 대략 난감했다. 두 사람은 문제를 하나하나 토론하며 답안의 방향을 잡아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이벽의 높은 식견은 다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 다산의 학문 세계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기(理氣)를 묻노라

정조가 ‘중용’에 대해 내린 70가지 질문 중 두 번째는 이(理)와 기(氣)의 선후에 대한 율곡과 퇴계의 주장을 짧게 인용한 뒤, 어느 것이 맞는지 적확(的確)한 의논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산의 대답은 이랬다. 조금 풀어서 옮긴다.

“신은 사단(四端)을 이(理)에 넣고, 칠정(七情)을 기(氣)에 두는 이분법적 사고에 오래 의문을 품어왔습니다. 만약 이런저런 주장에 얽매지 않고 선입견 없이 본다면 쉽게 따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기란 자유지물(自有之物), 즉 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理)는 의부지품(依附之品), 곧 실재에 기대어서만 드러나는 개념적인 것입니다. 의부지품은 반드시 자유지물에 기대야만 합니다. 실재가 있은 뒤에 개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를 펴서 이가 여기에 올라탄다(氣發理乘)고는 할 수 있어도 이를 펴서 기가 따라온다(理發氣隨)고는 말할 수 없겠습니다.”

퇴계의 주리설을 부정하고 율곡의 주기설에 손을 들어준 모양새가 되었다. 다산의 이 견해를 두고 제출 후 비난이 비등했지만 정조는 이를 칭찬했다. 일반론을 추종하지 않고 자기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다산의 이 생각은 바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천주실의’는 중국 선비와 서양 선비가 천주교의 주요 교리에 대해 토론하는 방식으로 기술한 책이다. 태극에 대해 논의하다가 질문이 이(理)의 문제로 옮겨갔을 때, 마테오 리치가 대답했다.

“대저 사물의 종류에는 두 가지가 있지요. 자립하는 것(自立者)과 기대는 것(依賴者)이 그것입니다. 천지와 사람, 조수 초목 등 다른 것에 힘입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자립지품(自立之品)이고, 다른 물건에 의탁하여 개념을 이루는 오상(五常)이나 칠정(七情) 같은 것은 의뢰지품(依賴之品)이 됩니다.”

마테오 리치가 자립지품이라고 한 것을 다산은 자유지물(自有之物)로 살짝 바꿨고, 의뢰지품은 의부지품이라 하여 한 글자만 교체했다. 배경에 깔린 개념 사유는 똑 같다. 마테오 리치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존재론에서 실체(substance)와 속성(attribute)으로 설명한 개념, 즉 구체적 개별자로서의 현상적 실체와 추상적 보편자로서의 초월적 이데아로 구분한 내용을 성리학의 이기 개념에 대입했다. 다산은 바로 그의 이 용어를 끌어와 조선 성리학 핵심 논쟁의 진앙지인 주기와 주리의 주장에 대입했던 셈이다. 그 뒤에 이벽이 서 있었다.

답안에서 다산은 이 밖에도 인격신으로서의 상제(上帝) 개념과 귀신의 문제 등에 대해 천주교의 관점을 반영한 과감한 주장을 펼쳐, 국왕 정조에게 심각한 인상을 남겼다. 생각의 틀을 바꾸자 안 보이던 지점이 보였다. 서학의 관점으로 경학을 보니 새로운 차원이 열렸다. 천주학은 유학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보유(補儒)’의 종자가 분명했다. 이벽의 느닷없는 선상 강의에 이어, 그의 조력을 받아 작성한 ‘중용강의’ 답안이 뜻밖의 성공을 거두자, 다산은 이벽에 대한 신뢰를 업고 천주학에 한층 더 급격히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순식간에 1,000명으로 불어난 신앙 조직

북경에서 서양 신부에게 직접 영세를 받아온 이승훈은 그때까지 정작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이승훈은 1789년 북경 천주당의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어떤 학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예전에 우리 종교에 관한 책을 한 권 발견하고는 그 책을 여러 해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으니, 그는 천주교에 관한 문제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까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과 열정은 그가 알고 있는 지식보다도 더욱 대단하였습니다.” 이승훈이 만났다는 어떤 학자는 말할 것도 없이 이벽이다.

이승훈은 같은 편지에서 “그들이 어찌나 열렬하게 영세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던지, 저는 모든 사람들의 요청대로 제가 북경에서 영세를 받을 때 행해졌던 예절에 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영세를 베풀어 주었습니다”라고 했고, 또 “1784년 이후부터 저희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들이 사방 천 리에서 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라고 썼다. 바싹 마른 들판에 불이 번지듯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신앙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산도 1784년 9월경에 자청해서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았다. 그의 영세명은 ‘약망(若望)’, 즉 사도 요한이었다.

이벽과 이가환의 사흘 논쟁

이가환은 자신의 생질인 이승훈과, 이벽과 다산 형제가 주축이 되어 천주교 신앙이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가환은 이를 제지하기 위해 이벽을 찾아갔다. 그 또한 서학에 미쳤던 사람이었다. 이가환은 남인계에서는 서학의 일인자였다. 하지만 철학과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었지 신앙 차원은 아니었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이벽과 이가환의 격정적인 토론은 여러 명의 입회 아래 무려 사흘간이나 계속 되었다. 황사영의 백서에도 이 토론회의 장면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산도 ‘정헌묘지명’에서 이가환이 그에게 가서 힐난했지만, 이벽이 장강대하 같은 웅변으로 철벽처럼 고수하므로 말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고 적었다. 세 사람의 기록이 같다.

전투에 가까운 사흘간의 논쟁은 이벽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천하의 천재 이가환도 이벽의 논리를 당해낼 수 없었다. 달레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가환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하나하나 그 논적에게 지적되고 조목조목 반박되었다. 이벽은 세밀한 점에까지 추궁하여 이가환의 논리의 건축을 모두 파괴하고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더 나아가 “그것은 마음이 순진하고 정직한 사람들을 많이 사로잡았으며, 새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 지배력을 강화하였다”고 썼다. 다산도 분명 이 자리에 입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토론에서 패한 뒤 이가환이 남겼다는 다음 한 마디가 인상적이다.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달레는 이후 이가환이 천주교에 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썼고, 황사영의 백서에서는 이와는 달리, 이후 이가환이 제자들을 권유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이벽 등과 아침저녁으로 비밀리에 왕래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적었다.

이가환을 무너뜨린 뒤 권철신을 찾아간 이벽. 학식과 인품이 뛰어나 영향력이 컸던 권철신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면 파급력이 엄청날 것이라 생각했다. 탁희성 그림, 김옥희 수녀 제공
도장 깨기

이가환과의 논쟁에서 승리한 이벽은 한층 자신감을 얻었다. 다음 번 논전은 이기양(李基讓)과의 사이에서 벌어졌다. 그는 천하의 이가환이 이벽에게 투항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벽에게 달려갔다. 다시 긴 토론이 벌어졌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이렇게 썼다. “이기양은 토론을 견뎌낼 수 없어 침묵을 지켰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믿는 듯하였으나, 솔직하게 그렇다고 시인할 결심은 하지 못했다.” 2차전 또한 이벽의 완벽한 승리였다.

두 차례의 논전에서 승리한 일로 한껏 고무된 이벽은 본격적인 도장 깨기에 나섰다. 그의 다음 타깃은 권철신이었다. 권철신은 성호학파의 한 흐름을 장악한 이른바 녹암계(鹿菴系)의 수장이었다. 그는 당대에 손꼽는 학자로 명망이 높았다. 고매한 인격까지 갖춰 모든 이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벽은 권철신이 천주교로 넘어 오면 그 파급력이 실로 엄청날 것이라 생각했다.

이벽은 다짜고짜 권철신의 집이 있는 양근의 감호(鑑湖)로 찾아갔다. 이벽은 10여일간 감호에 머물며 권철신과 그의 아우 권일신을 천주교의 진리로 이끌기 위해 설득을 거듭했다. 권철신이 망설이는 사이에 그의 아우 권일신은 곧바로 천주교 입교를 결심하고 행동에 옮겼다. 얼마 못 가 권일신은 그의 모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중인들에게까지 천주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다. 이후 양근 지역은 신앙촌이 형성되어, 1800년 5월에 지평(持平) 신귀조(申龜朝)가 임금께 올린 글에는 “양근 한 고을은 서학이 대단히 성행해서 안 배우는 사람이 없고, 행하지 않는 마을이 없다”고 썼을 정도였다. 천주교는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고, 초기 천주교회의 중심부에 다산이 있었다.

정민 한양대 교수

인기 기사

api_db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