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를 보수하라] <3>보수를 향한 진보의 고언

“보수의 트레이드 마크
‘반공ㆍ성장’ 버리고 혁신을
안보와 번영에 전향적 자세로
개헌ㆍ남북문제 등 협조해야”
서울 종로구 개인 연구실에서 만난 임혁백 고려대 교수. 서울대 정치학과를 거쳐 시카고대에서 석사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진보적 성향의 정치학자로 꼽힌다. 신상순 선임기자

“독일 모델이 뭡니까. ‘사회적 시장경제’ ‘노사공동결정과 공동경영’ 그리고 ‘질서 자유주의’ 같은 겁니다. ‘자유’와 ‘시장’을 하긴 하는데, 고삐 풀린 정글 자본주의 같은 건 안 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주장 누가 한 줄 아세요. 진보적인 거니까 다들 사민당이 했겠거니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보수인 기민당이 했습니다. 독일 보수는 나치 문제 때문에 집권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 기민당이 ‘우리가 이런 걸 하겠다’고 먼저 치고 나간 겁니다. 그 덕에 기민당은 사민당과 번갈아 집권할 수 있는, 때로는 지금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같은 지도자를 내세워 오래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정당이 된 겁니다.”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개인 연구실에서 만난 임혁백(66) 고려대 교수는 ‘보수 3.0’을 하려면 전후 독일 기민당 수준의 완전한 혁신을 선보이라고 주문했다. 완전한 혁신은 무엇일까. 보수의 트레이드 마크, ‘반공’과 ‘성장’부터 버리라 했다.

-지방선거에서 보수의 패배 원인부터 짚어보자면.

“자유한국당은 60대 이상 노인 정당, TK지역 정당이 됐다. 보수의 패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진보의 승리’라 표현하고 싶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촛불혁명이다. 의회에서 탄핵 찬성 표가 70%를 넘었고,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도 그 수준이다. 지방선거에서도 여당에 대한 지지가 그 정도 됐다. 거센 촛불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기여는.

“촛불 이전 문 대통령의 리더십은 뚜렷하지 못했다고 본다. 촛불의 흐름을 타면서 유능하고 정직한 지도자로 각인된 것 같다. 여기에다 남북관계, 북미관계에서 중재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국민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다. 사실 이건 보수로선 어쩔 수 없는 거다. 다만 이런 흐름 속에서 보수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그건 따져봐야 한다.”

-사실 ‘어깃장’뿐이지 않았나.

“세계적으로 냉전은 이미 1990년대 초 해체됐다. 더 이상 냉전적 사고는 안 된다고 수많은 이들이 조언, 충고해왔다. 성장문제도 그렇다. 1997년 외환위기로 정권을 빼앗겼다. 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일부 수용하면서 복지를 보충하고 IT에서 활로를 찾는, 나름의 대응책을 내놨다. 보수는 기존의 박정희식 재벌 위주 성장 이외엔 내놓은 게 아무 것도 없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뉴라이트 운동, 선진화 담론 같은 보수 혁신 움직임이 있었다.

“자신들은 그게 쇄신이라고,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다. 보수가 가장 먼저 깨야 할 것은 바로 그 신화다. 일종의 페이크(fake) 보수, 가짜 보수를 내세워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그 신화부터 깨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념 대신 중도 실용주의를 하겠다’고 했고, 박근혜 대통령도 ‘아버지의 꿈이 복지 국가였다’고 했다.

“말만 그랬다. 내용적으로는 올드라이트였고 극우로 역진(逆進)했다. 독일 기민당 사례에서 보듯, 말만 반성 어쩌고 하지 말고 실제 정책과 행동에서 혁신을 명백히 보여줘야 한다.”

-반공, 성장을 버릴 수 있을까. 당장 자유한국당 안에서 논란이다.

“보수의 매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더 잘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이지 않은가. 경직된 반공으로는 남북문제, 냉전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리 사는 게 과연 잘 사는 것이냐. 반대로 이 기회에 냉전을 해체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남한의 안보와 번영에 대해 더 풍부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수는 어느 쪽에 서야 하나. 자명한 일 아닌가. 그리고 보수야 말로 분배에 더 신경써야 한다. 불평등이 심화되면 중산층이 무너지고, 그렇게 되면 보수가 가장 큰 타격을 받는다. 다른 나라 보수 정당들이 왜 시장경제의 공정함에 대한 고민하겠는가.”

-보수는 남북ㆍ북미 관계가 깨지기만 바라는 듯 하다.

“김정은 위원장, 트럼프 대통령 개인에 대한 심리분석 좀 그만하라. 어쨌거나 두 사람 모두 일국의 지도자다. 선군정치, 핵ㆍ경제 병진노선을 거쳐 김 위원장은 경제집중노선을 내세웠다. 김 위원장은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트럼프의 정치’를 이해하고 싶다면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을 볼 필요가 있다. 참정권을 확대한 대중민주주의의 상징이다. 트럼프가 얘기하는 아메리칸 퍼스트, 고립주의, 보호무역주의 같은 게 바로 ‘잭슨 민주주의’의 구호다. 언뜻 즉흥적인 것 같지만 ‘잭슨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는 상당한 일관성이 있다.”

-북미 협상이 잘 풀려갈까.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으로 북미 정상회담 장소가 싱가포르라는 점에 주목한다. 중국의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의 모델로 삼은 곳이 싱가포르다. 독재해도 발전할 수 있다는 거다. 그 곳에서 북미가 만났다는 건 ‘핵만 없애면 북한도 발전할 수 있다’는 상징이다.”

-그러면 보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60대 이상, TK 정당이 된 이상 세대와 지역 지지 기반을 넓힐 수 있는 거의 모든 카드를 다 검토해야 한다. 이념은 결코 중요치 않다.”

-그간 보수는 이념 그 자체 아니었나.

“영국 노동당 역사를 보면 ‘fit to govern’이란 말이 나온다. 노동자 정당이니까 노동자만 위하는 게 아니라 영국 전체를 통치하는데 적합한 정당임을 입증하겠다는 말이다. 보수는 60대 이상, TK 일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통치하는데 적합하다는 걸 스스로 입증해 보여야 한다. 개헌문제, 남북문제, 일자리문제 등에서 현안에 대해 협조할 것은 통 크게 협조해야 한다. 성의 있는 태도와 자세를 보여야 한다.”

-바른미래당은 어떤가. 좀 색다른 보수가 아닐까 했는데 위태롭다.

“출발부터 잘못됐다. ‘안보는 보수를 하겠다’는 건데 ‘안보 보수’라면 자유한국당 찍지 왜 바른미래당에 표를 주겠나. 바른미래당은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은 거다. 색다른 보수를 하고 싶었다면 반공과 성장에 대해 훨씬 더 유연한 태도를 보였어야 했다. 독일 자민당의 사례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동방정책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 사민, 기민 두 정당이 번갈아 집권할 때 자민당은 제3당으로 양쪽 모두에 참여했다. 자민당 당수였던 한스 디트리히 겐셔가 1970년대부터 20여년 정도 외무장관을 맡으면서 동방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했다. 바른미래당이 기존 보수와 다른 보수를 하고팠다면, 연정 형식으로 일종의 캐스팅 보트를 쥐고 싶었다면 자민당 사례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우리 보수가 유연해야 할 것은 사회경제 정책보다 안보, 평화 쪽이다. 그래야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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