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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남북한 언어 통일 땐 더 멋진 언어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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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남북한 언어 통일 땐 더 멋진 언어될 것”

입력
2018.06.18 04:4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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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편찬자인 코리 스탬퍼는 “일을 하다 보면 단어의 잡초 밭에 발이 감겨 책상 위로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양손으로 감싼 채 뼈가 으스러지도록 집중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고 했다. 사진=마이클 라이온스타, 윌북 제공
사전 편찬자인 코리 스탬퍼는 “일을 하다 보면 단어의 잡초 밭에 발이 감겨 책상 위로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양손으로 감싼 채 뼈가 으스러지도록 집중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고 했다. 사진=마이클 라이온스타, 윌북 제공
美 웹스터사전 편집자 코리 스탬퍼 ‘매일 단어를 만들고…’ 국내 출간 “페미니즘을 남성 혐오와 연결하면 단어가 폐기될 거라 기대하지만 페미니즘은 문화적 생명력 지녀 의미가 간단하게 변하진 않을 것” “수백년 전 작가들도 단어 줄여 써 변화를 멈춘 언어는 죽어가는 법”

모든 생명처럼, 단어는 태어나고 늙고 사라진다. 단어의 생애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적확한 언어로 정의하는 사람, 사전 편찬자(Lexicographer)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사전 출판사인 ‘메리엄 웹스터’의 사전 편찬자 코리 스탬퍼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미국 매사추세츠 쇠락한 동네의 낡은 벽돌 건물 2층이 그의 사무실이다. 독서실처럼 칸막이 쳐진 책상에 앉아 20년 넘게 단어와 씨름했다. 매일 최소 8시간씩 한 마디도 하지 않고서. 그 고되고도 신성한 역사를 유쾌한 필치로 기록한 책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가 최근 출간됐다. 언어를 좋아한다면, 영어 울렁증이 없다면, 쥐어 짜는 감성을 앞세운 에세이가 지긋지긋하다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이메일로 만난 저자는 ‘고리타분한 언어순정주의자’가 아니었다. 언어를 넘치게 사랑할 뿐.

-언어는 오염되는 존재인가. 언어를 줄여 쓰는 젊은 세대의 습관이 정말로 언어를 타락시키나.

“언어는 늘 그런 걱정을 샀다. 1200년대에도 영어가 죽어간다고 걱정했지만, 영어는 여전히 잘 나가지 않나. 수백 년 전에도 작가들은 단어를 줄여 썼다. 변화를 멈춘 언어는 죽는다.”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단어는 뭔가. 사람들은 보통 ‘어머니’, ‘사랑’을 꼽을 텐데. 반대로, 가장 추한 단어는.

“발음이 아름다운 단어가 아름답다. Mellifluous(달콤한)’의 꿀이 흐르는 듯한 발음을 좋아한다. 감탄사 ‘Gardyloo(물이다, 조심해)’도 좋아한다. 건물 고층에서 창문 밖으로 구정물을 쏟아 버리곤 했던 몇 세기 전 스코틀랜드 일부 지역에서 쓴 단어가 사전까지 올랐다는 게 흥미롭다. 사전 편찬자는 공식적으로는 어떤 단어도 싫어해선 안 되지만, ‘Business’와 ‘Leisure’를 합친 ‘Bleisure(일하는 틈틈이 여가를 즐기는 것)’의 발음은 싫어한다. 피부병 이름처럼 들린다.”

-만약 언어가 멸종한다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 남을 단어는 뭘까.

“‘어머니’, ‘아버지’, ‘나’, ‘너’, ‘개’, ‘고양이’ 등의 기본적 존재를 지칭하는 단어일 거다. 감성적이 돼 본다면, ‘사랑’ 같은 단어가 남기를 바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활자매체가 힘을 잃어 가는데, 종이사전은 존속할까.

“종이사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사전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인터넷이 바꾸고 있는 건 맞다. 인터넷 사전에 수집되는 피드백을 보면서 단어를 정의하는 방식을 달리 하거나 사람들이 자주 찾아 보는 단어를 정의하는 데 노력을 더 많이 쏟을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사전은 대화와 더 비슷해지고, 결국 사전이 기록하는 언어를 닮아갈 것이다.”

-인공지능(AI)이 사전 편찬자의 일자리를 빼앗을 가능성은.

“AI가 사전 편찬자를 앞지르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새로 생긴 단어를 발견, 수집해 알려주거나, 단어를 품사, 용법 별로 분류해 주는 일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만. 단어를 정의하는 건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AI가 그것까지 해내기는 어려울 거다.”

-‘걸어다니는 사전’,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같은 표현이 상징하는 사전의 권위는 그래도 흔들리는 것 아닌가.

“사전 편찬자들은 사전이 엄청난 권위를 누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사전의 유일한 권위는 단어를 기록하고 정의하는 것이다. 사전이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권위 있다는 오해를 퍼뜨린 건 사전 출판사들이다. 사전 안에서 인류의 모든 지식을 찾을 수 있다고 홍보한 게 시작이었다.”

-이모티콘(이모지)이 언젠가 사전에 실리게 될까.

“미국의 몇몇 사전은 이미 실었다. 이모티콘을 사전에 올리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모티콘의 작동 방식은 단어와 다르다. 다른 이모티콘과 함께 쓰면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고, 플랫폼에 따라 모양이 바뀌기도 한다. 예컨대 삼성과 애플 스마트폰에서 이모티콘은 다르게 보인다. 사전에서 그걸 일일이 설명하려면 골치가 아플 거다.”

-‘결혼(Marriage)’에 ‘전통 결혼과 유사한 관계로 동성인 사람과 맺어진 상태’라는 뜻을 추가했다 봉변을 당한 이야기를 책에 썼다.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한국에도 있다. ‘페미니즘’의 뜻을 ‘남성 혐오주의’로 몰아 가려 한다. 오늘이 사전 편집 마감이라면, 페미니즘을 어떻게 정의할 건가.

“미국에서도 보수 진영의 유명한 여성 일부가 페미니즘이 남성 혐오를 의미하므로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을 혐오와 연결하면 페미니즘이 폐기될 거라고 기대하는 거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정치적, 문화적으로 깊은 생명력을 지닌 단어다. 몇몇 사람이 애쓴다 해도 의미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그렇게 간단하게 변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현재 사전적 정의이자 정확한 정의는 이거다. 첫번째는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정치∙경제∙사회적 성평등과 관련한 이론’, 두번째는 ‘여성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조직된 활동’.

-‘미투(MeToo)’는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았다. 미투를 정의한다면.

“권력자인 남성을, 특히 여성에 대한 성적 위법 행위와 관련해 고발하는 풀뿌리 운동이자, 그 운동을 지지하려 SNS에서 사용하는 해시태그(#미투).”

-Marriage처럼 정의하면서 유난히 힘들었던 단어가 또 있나.

“God(신)이다. 정말 어려웠다. 신이 들어간 문장이 워낙 많았다. 메리엄 웹스터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문장만 거의 2만건이었다. 신은 매우 큰 주제여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의 의미는 저마다 다르다. 게다가 사람들은 신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사용되면 ‘엄청나게’ 화를 낸다. 예컨대 ‘그는 K팝의 신이다’는 문장에서 신은 인기가 많아 숭배 받는 사람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을 숭배하느냐고 분개하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다. 결국 신만 네 달 붙들고 있었다.”

-남북한 통일 시대 언어를 준비하는 ‘겨레말 큰사전’을 만드는 사업이 다시 추진되고 있다. 사전 편찬자들에게 조언한다면.

“그런 대단한 작업에 참여하는 분들께 경의를 표한다. 한국어는 매우 논리적 언어다. 그럼에도 사전 편찬 과정에서 놀랄 일이 많을 것이다. 나 역시 종종 영어가 너무나 어렵게 느껴져 스스로 원어민인가를 의심하곤 한다. 그게 사전 편찬이라는 일을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이자 언어를 멋지게 만드는 요소 아닐까.”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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